1959년 10월 17일 李明求가 高光斗에게 답장으로 보낸 편지이다.
간찰은 書簡, 書信, 書札, 簡牘 등으로 부르며, 고문서 형태로 전해진다. 문집에 수록된 간찰은 '書'로 분류하여 수록하기도 하는데, '서'란 고문서 형태의 간찰이 문집에 수록된 것을 말한다. 간찰은 일반적으로 皮封과 내용으로 구성되고, 내용은 다시 本紙와 別紙로 구별할 수 있다. 흔히 간찰이라고 하는 것은 편지의 본문인 본지를 의미한다. 小紙, 胎紙 등으로도 불리는 별지에는 본지에 적기 어려운 구체적인 내용이나 보내는 선물, 은밀한 부탁이나 청탁 등이 기록된다.
간찰의 내용은 書頭, 候問, 自叙, 述事, 結尾로 나뉜다. 서두에는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안부 인사를 적고, 후문에는 상대방의 안부를 묻는다. 자서에는 간찰을 보내는 사람 본인의 근황을 서술하며, 술사에서는 간찰을 보낸 이유를 적고, 결미는 간찰의 마지막 부분으로서 간단히 끝맺는 말과 날짜, 성명, 올림[재배(再拜)] 등의 항목을 순서대로 적는다.
편지의 작성연도가 '己亥'로 기재되어 있고, 손양면이 1946년에 개칭된 명칭이므로 1959년에 작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편지의 봉투를 통해 이명구는 충북 청주시 수동읍에 살고 있으며, 당시 송자사우중건추진위원회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수신인인 고광두는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송전리에 거주하였다.
이 편지는 현대에 작성된 문서임에도 조선시대 간찰의 형식으로 작성되었다. 먼저 이명구는 삼가 편지를 받으니 자리를 함께 한 것처럼 위로가 되었다고 하며 편지를 시작하고 있다. 이어 서리가 내리는 때에 형편이 두루 좋다고 하니 위로가 된다고 하며, 자신은 여전하다고 하였다.
주요내용은 사우 중건에 필요한 후원금을 받는 것이다. 이명구는 보내주신 금액에 고마워하며, 특히 북청의 吳永斗가 더욱 고마우니 이런 뜻을 전해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位土와 祠宇 비용으로 800만환을 정해 수금 중인데 어려움이 있더라도 다시 공문이 오는 대로 베풀어 주시길 바라며, 내년 봄에 사우가 중건될 것이니 그때 오시는 것이 어떻겠냐며 용건을 마치고 있다. 추신으로는 영수증은 사람마다 각각 보낸다고 알리며, 음력 6월 20일에 표기한 곳으로 이사했으니 헤아려 주길 바란다고 하였다.
송자는 송시열(1607~1689)을 말하며, 이명구가 속한 송자사우중건추진위원회는 1964년 尊賢錄을 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