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1828년(순조 28) 江陵大都護府에서 幼學 金秉爀에게 발급한 준호구이다.
준호구는 자신의 신분 및 재산을 확인하는 지금의 주민등록등본과 비슷한 개념으로 볼 수 있다. 각 가문에서 관에 신청하면 관은 호적대장을 토대로 준호구를 작성하여 발급한다. 18세기 이후가 되면 준호구 작성양식이 간소화되고 작성주체가 민간으로 이관되면서 해당 가문에서 직접 준호구를 작성하여 관의 확인을 받는 관례가 생겼다. 朱墨표시가 현저하게 소략해지고 周挾改印도 형식적으로 이루어지며, 준호구에 호구단자의 형식이 들어간 사례도 보여 준호구와 호구단자 간 형식상 구분이 모호하게 되었다. 이 문서도 호의 주소와 주호, 주호의 사조사항, 처에 대해서는 列書하고 소유 노비에 대해서는 連書하는 등 호구단자와 준호구의 양식이 혼용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문서에 따르면 金秉爀은 北二里面 校洞里 제2통 제2호에 거주하고 있다. 호수는 원래 4호로 기재되어 있었으나 朱墨으로 2호로 고쳐 썼다. 통수는 業武 李允九이다. 업무는 본래 業儒와 같이 유학과 무학을 연마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조선후기에 와서 직역화되었다. 처음에는 양반의 직역으로 사용되었다가 점차 지위가 저하되면서 서얼에 대한 직역으로 변하였다. 통수는 각 호의 변동사항 등을 파악해야 하는 번거로운 일을 맡았기 때문에 양반보다는 평민이나 노비가 주로 맡는 직책이었다. 때문에 김병혁이 거주하는 곳의 통수를 업무인 이윤구가 맡고 있는 것이다.
김병혁은 32세이고 본관은 강릉이다. 문서의 결락으로 출생간지를 알 수 없으나 연관문서를 통해 김병혁은 정사(1797)생임을 알 수 있다. 김병혁의 사조사항을 살펴보면, 부친은 學生 金學胤이고, 생부는 유학 金宗霖이다. 조부는 학생 金啓澤이고, 증조부는 折衝將軍 僉知中樞府事 金昌載이며, 외조부는 학생 權星度으로 본관은 안동이다. 김병혁의 사조에 생부가 기재된 것으로 보아 김병혁은 김학윤의 양자임을 알 수 있다. 부친과 생부의 관계는 확인되지 않는다.
김병혁은 처와 함께 기재되어 있다. 처는 安東權氏로 당시 나이는 27세이고 임술(1802)생이다.
김병혁이 소유한 노비는 총 12구가 기재되어 있다. 노비를 기재한 부분에는 刀割한 곳이 있어 이름이 확인되지 않는 노비가 있다.
문서를 보면 호의 주소가 기재된 행의 첫 머리에 朱點을 찍었으며 官印과 都護府使의 署押이 확인된다. 노비를 기재한 곳에 수정한 흔적이 확인되나 문서에는 周挾改印을 찍고 있으며 문서를 대조, 확인했다는 의미의 準자를 주협개인 옆에 기재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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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춘, 강원도내 戶口 古文書의 현황과 특이사례에 대한 검토, 古文書硏究39, 한국고문서학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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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2003
집필자 : 신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