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0년 江陵大都護府에서 경자식년에 작성한 호구장적을 토대로 幼學 金昌載에게 발급해 준 준호구이다.
강릉 강릉김씨 가문에서 소장하고 있는 호구 문서는 총 39건으로 모두 준호구이다. 작성시기는 1735년부터 1885년까지로 150여년에 걸쳐 있다. 주호별로 살펴보면 金泰柱 3통, 金昌載 14통, 金漢鎭 3통, 金啓贇 2통, 金秉爀 9통, 金演敎 1통, 金演斗 2통, 金演八 5통이 있다.
김창재는 北面二里面 洪濟里 제1통에 거주하는데 통수는 孫有同이고 통내 제4호에 거주하고 있다.
김창재가 1780년 이전에 발급받은 준호구에 의하면 김창재는 山皇里에서 거주하였으나 이 준호구부터 거주지가 洪濟里로 기재되어 있다.
김창재는 갑오(1714)생으로 당시 67세이며 본관은 강릉이다. 부친은 通政大夫 金泰柱이고, 조부는 折衝將軍 行龍驤衛副護軍 金守聲이며, 증조부는 學生 金檜樑이다. 외조부는 學生 崔晦로 본관은 강릉이다.
가족구성원은 처와 아들이 있는데 처 順興安氏는 임인(1722)생으로 59세이다. 안씨의 부친은 유학 安如岳이고, 조부는 학생 安瑛이며, 증조부는 通政大夫 安應禎이다. 외조부는 학생 鄭度昌으로 본관은 동래이다. 아들 유학 金漢鏞은 20세 신사(1761)생이고, 그의 처 平海黃氏는 경진(1760)생으로 21세이다.
소유한 노비는 28口로 그 중 도망간 노비는 3구이고, 외거노비는 22구이다.
이 문서는 준호구임에도 불구하고 호구단자의 양식인 열서로 기재하고 있다. 이처럼 18세기 이후 일부지역에서는 호구단자와 준호구의 문서 양식이 혼용되어 사용되었다. 최근 연구 성과에 따르면 문서작성 절차가 간소화되면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 문서 또한 이러한 변화양상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거주지 주소의 기재사항위에 주점이 찍혀 있고 문서의 좌측하단에 주묵으로 '準'이라고 써서 호구대장과 확인을 마쳤음을 표시하였다. 문서 왼쪽 상단에는 강릉대도호부사의 署押이 보이고 문서 좌측 하단에는 周挾改印이 찍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