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1792년 江陵大都護府에서 계묘식년에 작성한 호구장적을 토대로 幼學 金昌載에게 발급해 준 준호구이다.
강릉 강릉김씨 가문에서 소장하고 있는 호구 문서는 총 39건으로 모두 준호구이다. 작성시기는 1735년부터 1885년까지로 150여년에 걸쳐 있다. 주호별로 살펴보면 金泰柱 3통, 김창재 14통, 金漢鎭 3통, 金啓贇 2통, 金秉爀 9통, 金演敎 1통, 金演斗 2통, 金演八 5통이 있다.
호구단자는 관에서 3년마다 호적장적을 만들 때, 주호가 자신의 호의 상황을 적어서 官에 제출한 문서이고, 준호구는 관에서 호적장적에 의거하여 개인의 호적 사항을 증명해 준 문서이다. 1896년 신호적법이 시행되기 전까지 조선시대의 호구식과 준호구식은 경국대전의 규정에 의거하였다.
문서에 의하면 김창재는 北二里面 洪濟里 제3통에 거주했는데 통수는 金業孫이다.
김창재는 갑오(1714)생으로 당시 79세이며 본관은 강릉이다. 부친은 通政大夫 金泰柱이고 조부는 折衝將軍 行龍驤衛副護軍 金守聲이다. 증조부는 學生 金檜樑이고 외조부는 學生 崔晦로 본관은 강릉이다.
가족구성원은 처와 아들, 며느리가 있었는데 처는 사망하였다. 아들 유학 김한진은 신사(1761)생으로 42세이고 그의 처 平海黃氏는 경진(1760)생으로 43세이다.
아들 김한진의 나이가 42세로 나오는데 이전 문서와 본 문서와의 연도 차이가 6년이라는 점과 다음 준호구에서 35세로 나오는 것을 볼 때 42세는 32세의 오기로 추정된다. 김한진의 처의 나이도 33세를 잘못 기재한 것이다.
기재된 노비의 수는 26口로 그중 도망노비는 1구, 외거노비는 21구로 소유한 노비는 4구이다.
노비 중 壬切은 1774년 준호구에 節現이라고 표기되어 있었으나 18년이 지난 이 문서에서도 계속 절현으로 표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