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3년 김창재(金昌載) 준호구(準戶口)

ㆍ자료UCI: KNU+GWKSMC+KSM-XD.1783.4215-20160501.2015000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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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 고문서-증빙류-호적 |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 작성주체 발급 : 강릉현(江陵縣)
수취 : 김창재(金昌載)
· 작성지역 강릉현
· 작성시기 乾隆四十八年(1783)
· 형태사항 58.5 X 77.0 | 1장 | 종이 | 한자 | 낱장
· 인장서명 1 (적색, 정방형, 5.5*5.5, 江陵縣印)
1 (흑색, 장방형, 14.4*5.4, 周挾改印)
· 원소장처 강릉 강릉김씨
· 현소장처 강릉 강릉김씨

연결자료

안내정보

이 문서는 1783년 강릉현(江陵縣)에서 계묘식년에 작성한 호구장적을 토대로 유학(幼學) 김창재(金昌載)에게 발급한 준호구(準戶口)이다.
김창재갑오(1714)생으로 당시 70세이며 본관은 강릉이다. 가족구성원은 처 순흥안씨(順興安氏), 아들 유학 김한용(金漢鏞), 며느리 평해황씨(平海黃氏)가 있다.

상세정보

이 문서는 1783년 강릉현에서 계묘식년에 작성한 호구장적을 토대로 幼學 金昌載에게 발급한 준호구이다.
동해 강릉김씨 가문에서 소장하고 있는 호구 문서는 총 39건으로 모두 준호구이다. 작성 시기는 1735년부터 1885년까지로 150여년에 걸쳐 있다. 주호별로 살펴보면 金泰柱 3통, 金昌載 14통, 金漢鎭 3통, 金啓贇 2통, 金秉爀 9통, 金演敎 1통, 金演斗 2통, 金演八 5통이 있다.
이 문서는 이전 준호구에서 강릉대도호부사 혹은 대도호부사의 署押이 있던 것과 달리 현감의 서압이 보여 강릉부가 현으로 강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강릉부가 강릉현으로 강등된 이유는 1782년 5월 李澤徵李有白의 대역부도죄 사건에 연관되어 신문을 받다가 죽었는데 이택징강릉부에 살았기 때문에 강릉부를 강릉현으로 바꾸고 강원도의 명칭도 원춘도로 바뀌게 된 것이다.
문서에 의하면 김창재北面二里面 洪濟里 제5통에 거주했는데 통수는 孫有同이다.
김창재갑오(1714)생으로 당시 70세이며 본관은 강릉이다. 부친은 通政大夫 金泰柱이고 조부는 折衝將軍 行龍驤衛副護軍 金守聲이다. 증조부는 學生 金檜樑이고 외조부는 학생 崔晦로 본관은 강릉이다.
가족구성원은 처와 아들, 며느리가 있는데 처 順興安氏임인(1722)생으로 62세이다. 안씨의 부친은 유학 安如岳, 조부는 학생 安瑛, 증조부는 通政大夫 安應禎, 외조부는 학생 鄭度昌으로 본관은 동래이다. 아들 유학 金漢鏞신사(1761)생으로 23세였으며 金漢鎭으로 개명하였다. 그의 처 平海黃氏경진(1760)생으로 24세이다.
소유한 노비는 28口로 그 중 도망간 노비는 3구이고, 외거노비는 21구이다.
이 문서는 준호구임에도 호구단자식인 列書하였다. 이처럼 18세기 이후 일부지역에서는 준호구임에도 불구하고 호구단자처럼 가족사항을 별행으로 기재하는 문서가 나타나고 반대로 호구단자임에도 준호구와 같이 연서하여 기재하는 문서가 등장한다. 즉 호구단자와 준호구의 문서 양식이 혼용되어 사용된 것인데 최근 연구 성과에 따르면 문서작성 절차가 간소화되면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이후에는 문서의 형식뿐만 아니라 용도까지도 혼용되기에 이른다. 이 문서 또한 이러한 변화양상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거주지 주소의 기재사항위에 주점이 찍혀 있고 문서의 좌측하단에 주묵으로 '準'이라고 써서 호구대장과 확인을 마쳤음을 표시하였다. 문서 왼쪽 상단에는 강릉현감의 署押이 보이고 문서 좌측 하단에는 周挾改印이 찍혀 있다.
참고문헌
권내현,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역사비평사, 2015
유재춘, 강원도내 戶口 古文書의 현황과 특이사례에 대한 검토, 古文書硏究39, 한국고문서학회, 2011
손병규, 호적, 휴머니스트, 2006
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2003
집필자 : 신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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