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년 江陵大都護府에서 丁卯式年의 호구장적에 의거하여 幼學 金啓來에게 발급한 준호구이다. 주호의 기재사항에는 주호 김계래가 개명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김계래는 이름을 여러 차례 개명하였는데 金漢鏞에서 金漢鎭, 金啓來, 金啓贇순으로 이름을 개명하였다.
문서에 의하면 김계래는 신사(1761)생으로 나이는 50세이고 府北二里 聲谷面에 거주하고 있다. 본관은 강릉이다.
부친은 折衝將軍 僉知中樞府事 金昌載이고 조부는 通政大夫 金泰柱이다. 증조부는 折衝將軍 行龍驤衛副護軍 金守聲이고 외조부는 學生 安如岳으로 본관은 순흥이다.
가족구성원은 처와 아들이 있는데 처 江陵朴氏는 신사(1761)생으로 31세이다. 처의 부친은 학생 朴在黙이고 조부는 학생 朴誠中이다. 증조부는 학생 朴致道이고 외조부는 학생 崔尙霖으로 본관은 강릉이다. 아들 童蒙 金學悅은 임자(1792)생으로 19세이다. 본 문서보다 6년 전에 작성된 준호구에 의하면 김계래는 아들 2명과 며느리 1명이 있었는데 이 문서에서는 기재되지 않으므로 6년 사이에 분호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김학열은 6년 전 문서에서는 이름이 金必重으로 기재되었는데 이 문서에서는 이름이 바뀌어 기재되었다.
김한진이 소유한 노비는 총 9口이다.
이 문서는 준호구임에도 불구하고 연호와 가족사항을 열서로 기재하고 있다. 즉 호구단자와 준호구의 문서 양식이 혼용되어 사용된 것인데 최근 연구 성과에 따르면 문서작성 절차가 간소화되면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이후에는 문서의 형식뿐만 아니라 용도까지도 혼용되기에 이른다. 이 문서 또한 이러한 변화양상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거주지 주소의 기재사항위에 주점이 찍혀 있고 문서의 좌측하단에 주묵으로 '準'이라고 써서 호구대장과 확인을 마쳤음을 표시하였다. 문서 왼쪽 상단에는 강릉대도호부사의 署押이 보이고 문서 좌측 하단에는 周挾改印이 찍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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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춘, 강원도내 戶口 古文書의 현황과 특이사례에 대한 검토, 古文書硏究 39, 한국고문서학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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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2003
집필자 : 신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