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1801년 江陵大都護府에서 임자식년에 작성한 호구장적을 토대로 折衝將軍 僉知中樞府事 金昌載에게 발급해 준 준호구이다.
강릉 강릉김씨 가문에서 소장하고 있는 호구 문서는 총 39건으로 모두 준호구이다. 작성시기는 1735년부터 1885년까지로 150여년에 걸쳐 있다. 주호별로 살펴보면 金泰柱 3통, 김창재 14통, 金漢鎭 3통, 金啓贇 2통, 金秉爀 9통, 金演敎 1통, 金演斗 2통, 金演八 5통이 있다.
호구단자는 관에서 3년마다 호적장적을 만들 때, 주호가 자신의 호의 상황을 적어서 官에 제출한 문서이고, 준호구는 관에서 호적장적에 의거하여 개인의 호적 사항을 증명해 준 문서이다. 1896년 신호적법이 시행되기 전까지 조선시대의 호구식과 준호구식은 경국대전의 규정에 의거하였다.
준호구에는 발급시기와 발급 관부, 참고한 호적장적, 주소, 주호의 직역・성명・나이・본관, 주호의 사조, 주호 처의 성씨・나이・본관, 주호 처의 사조, 같이 거주하는 자녀의 나이, 노비의 나이 등을 기재한 후 발급자의 수결, 관인, 호적장적과 비교하여 내용을 수정했는지 여부를 표시하는 주협개인을 날인하였다. 준호구의 작성 시기는 반드시 중국의 연호를 썼고 참고한 호적장적에서 마지막 내용인 노비의 나이까지 연속된 문장으로 連書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문서에 의하면 김창재는 北二里面 洪濟里 제3통에 거주했는데 통수는 崔云宅이다.
김창재는 갑오(1714)생으로 당시 88세이며 본관은 강릉이다. 부친은 通政大夫 金泰柱이고 조부는 折衝將軍 行龍驤衛副護軍 金守聲이다. 증조부는 學生 金檜樑이고 외조부는 학생 崔晦로 본관은 강릉이다.
가족구성원은 아들과 며느리가 있었는데 며느리는 사망하였다. 아들 유학 김한진은 신사(1761)생으로 41세이다.
소유한 노비는 6口이다.
이 문서는 준호구임에도 불구하고 연호와 가족사항을 열서로 기재하고 있다. 이처럼 18세기 이후 일부지역에서는 준호구임에도 불구하고 호구단자처럼 가족사항을 별행으로 기재하는 문서가 나타나고 반대로 호구단자임에도 준호구와 같이 연서하여 기재하는 문서가 등장한다. 즉 호구단자와 준호구의 문서 양식이 혼용되어 사용된 것인데 최근 연구 성과에 따르면 문서작성 절차가 간소화되면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이후에는 문서의 형식뿐만 아니라 용도까지도 혼용되기에 이른다. 이 문서 또한 이러한 변화양상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거주지 주소의 기재사항위에 주점이 찍혀 있고 문서의 좌측하단에 주묵으로 '準'이라고 써서 호구대장과 확인을 마쳤음을 표시하였다. 문서 왼쪽 상단에는 강릉대도호부사의 署押이 보이고 문서 좌측 하단에는 周挾改印이 찍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