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8년 노응렬(盧應烈) 준호구(準戶口)

ㆍ자료UCI: KNU+GWKSMC+KSM-XD.1888.4671-20180501.2017000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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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 고문서-증빙류-호적 |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 작성주체 발급 : 담양부(潭陽府)
수취 : 노응렬(盧應烈)
· 작성지역 담양부
· 작성시기 光緖十四年(1888)
· 형태사항 34.3 X 51.4 | 1장 | 종이 | 한자 | 낱장
· 인장서명 1 (적색, 정방형, 7.5*7.5, 潭陽府印)
1 (흑색, 장방형, 17.5*6.4, 周挾改字印)
· 원소장처 담양 광산노씨
· 현소장처 원주역사박물관

연결자료

안내정보

1888년(고종 25) 담양부(潭陽府)에서 무자식년(1888)의 호적대장을 토대로 작성하여 유학(幼學) 노응렬(盧應烈)에게 발급해 준 준호구이다.
노응렬계유(1813)생이고, 나이는 76세이며, 본관은 광산이다. 이 문서를 제외한 모든 연관문서에는 노응렬의 생년간지가 계미(1823)생으로 적혀 있어 주호의 나이가 10살이 차이나게 기재되어 있다. 거주지는 담양부 용동면(龍洞面) 복흥리(復興里)로 이 지역은 지금의 담양군 용면 일대로 짐작된다. 가족으로는 처 옥천옹씨(玉川邕氏), 첫째 아들 유학 노시규(盧時奎), 첫째 며느리 장수황씨(長水黃氏), 둘째 아들 유학 노시문(盧時文), 둘째 며느리 문화유씨(文化柳氏)가 있다.
노비는 1구(口)가 기재되어 있으나 도망갔다.

상세정보

1888년(고종 25) 潭陽府에서 幼學 盧應烈에게 발급해 준 준호구이다.
문서에 따르면 이 준호구는 무자식년(1888)의 호적대장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노응렬계유(1813)생이고, 나이는 76세이고, 본관은 광산이다. 이 문서를 제외한 모든 연관문서에는 노응렬의 생년간지가 계미(1823)생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이 문서에는 10살이 많게 기재되어 있다. 거주지는 담양부 龍洞面 復興里로 이 지역은 지금의 담양군 용면 일대로 짐작된다.
노응렬의 사조를 살펴보면 부친은 學生 魯基弼이고, 조부는 학생 盧啓昌이며, 증조부는 通政大夫 折衝將軍 行龍驤衛副護軍 盧漢鳳이다. 외조부는 학생 金洙采로 본관은 광산이다.
가족은 주호를 포함하여 모두 6명으로 처 옥천옹씨, 첫째 아들 유학 盧時奎, 첫째 며느리 장수황씨, 둘째 아들 유학 盧時文, 둘째 며느리 문화유씨와 함께 거주하였다. 처 옥천옹씨경진(1820)생으로, 69세이다. 처의 부친은 학생 邕哲秀이고, 조부는 학생 邕日華이며, 증조부는 학생 邕㣧慶이다. 외조부는 학생 洪相濟로 본관은 남양이다.
첫째 아들 노시규정미(1847)생으로 42세이고, 첫째 며느리 장수황씨경술(1850)생으로 39세이다. 둘째 아들 노시문경술(1850)생으로 39세이며, 둘째 며느리 문화유씨계축(1853)생으로 36세이다.
노비는 1口가 기재되어 있는데 도망갔다. 도망간 노비는 여자종 八今으로, 팔금은 이미 1861년 준호구에 도망간 사실이 기재되었다가 이후 문서에서는 도망간 사실이 기재되지 않았는데 이 문서에서 다시 도망간 것을 기재하였다.
노비 기재사항 뒤에는 '壬午戶口相準印'을 적어 임오년(1882)의 호구와 비교・대조하였다고 적혀 있지만 이 문서의 작성연도가 1888년이므로 전 식년인 을유년(1885)을 잘못 기재한 것으로 짐작된다.
문서를 살펴보면 좌측에는 行府使의 署押과 周挾改字印이 있고, 우측에는 潭陽府印이 확인된다. 또한 문서의 좌측에 기재된 '唱色'과 '準色'은 준호구를 작성한 자들을 나타내는 것이다. 준호구를 작성할 때는 전에 보고한 호구단자를 토대로 하는 데 이때 불러 주는 자는 '', 쓰는 자는 ''이라 부른다. 대개는 창색준색의 성씨를 쓰고 수결을 하는데 본 문서에는 기재하지 않았다.
참고문헌
권내현,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역사비평사, 2015
이기봉, 고지도를 통해 본 충청지명연구 2, 국립중앙도서관 도서관연구소, 2014
문현주, 조선후기 漢城府에서의 戶口單子·準戶口 작성 과정에 관한 再考, 古文書硏究42, 한국고문서학회, 2013
손병규, 호적, 휴머니스트, 2006
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2003
집필자 : 황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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