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1768년 幼學 盧啓昌이 작성하여 靈光郡에 제출한 호적단자이다.
문서의 말미에 戊子라 기재되어 있고, 연관문서 중에 준호구가 있어 1768년에 작성된 문서임을 알 수 있다.
노계창은 32세로 정사(1737)생이고, 본관은 광산이다. 이름 앞에 '鰥夫'라고 기재되어 있어, 처를 여의었음을 알 수 있다. 거주지는 영광군 佛甲面 九龍里로 지금의 영광군 불갑면 일대에 해당한다. 노계창의 부친은 유학 盧漢鳳으로 을해(1695)생이며, 74세이다. 조부는 學生 盧一玖이고, 증조부는 학생 盧俶이다. 외조부는 본관이 수원인 학생 白凞彩이다. 부친 노한봉은 직역이 유학이고 나이가 기재된 것으로 보아 당시 생존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문서와 연관된 광산노씨 가문의 문서는 모두 37건이 현존하며 모두 호구관련 문서이다. 이중 노계창이 주호로 작성된 문서는 이 문서 외에 호적단자 1통과 준호구 1통이 있으며 이 문서가 가장 이른 시기에 작성된 것이다. 이 다음에 작성된 문서는 18년이 지난 1786년 준호구이고, 작성지역도 담양부이다. 그리고 연관문서 중에는 노계창의 생년을 병오년(1726)으로 기재한 경우가 있어 생년이 11년이나 차이가 나지만 이유는 알 수 없다. 또한 연관문서에는 노한봉의 직역이 折衝將軍 行龍驤衛副護軍으로 적혀 있어 이후에 노한봉의 직역이 바뀐 것을 짐작할 수 있고, 외조부의 이름은 白漢範으로 기재되어 있어 문서의 기재사항에 차이가 있다.
가족은 기재되어 있지 않는데 연관문서에 따르면 노계창의 처는 完山李氏이고 슬하에 아들 盧震益과 盧義得을 두었다가 아우 盧啓明의 아들인 盧八元을 성인이 된 후 양자로 들인 점으로 미루어보아 두 아들은 사망한 것으로 짐작된다.
노비는 남자종 1口와 여자종 1구가 기재되어 있는데 이 둘은 노비인 아버지와 양인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문서를 살펴보면 주호의 기재사항 위에 朱點을 찍어 표시하였고, 호적단자임에도 行郡守의 署押, 官印, 周挾改印이 찍혀 있다. 그리고 문서의 좌측 중앙에 다른 문서들과 함께 묶어 놓았던 종이끈의 흔적이 남아 있다.
참고문헌
권내현,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역사비평사, 2015
문현주, 조선후기 漢城府에서의 戶口單子·準戶口 작성 과정에 관한 再考, 古文書硏究42, 한국고문서학회, 2013
손병규, 호적, 휴머니스트, 2006
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2003
집필자 : 황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