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1년(철종 12) 潭陽府에서 幼學 盧應烈에게 발급해 준 준호구이다.
문서에 따르면 이 준호구는 신유식년(1861)의 호적대장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노응렬은 부친 盧基弼이 사망하자 대신하여 주호가 되었다. 당시 나이는 39세이고, 생년은 계미년(1823)이며, 본관은 광산이다. 거주지는 담양부 龍洞面 復興里이며, 통・호수는 기재하지 않았다. 이 지역은 지금의 담양군 용면 일대로 짐작된다. 문서의 발급연도와 호적대장의 성적시기는 문서의 탈락으로 일부가 훼손되어 판독할 수 없지만, 담양 광산노씨 가문의 연관문서를 통해 추정이 가능하다.
노응렬의 사조를 살펴보면 부친은 學生 노기필이고, 조부는 학생 盧啓昌이며, 증조부는 通政大夫 折衝將軍 行龍驤衛副護軍 盧漢鳳이다. 외조부는 학생 金洙采로 본관은 광산이다.
가족으로는 처 玉川邕氏, 첫째 아들 童蒙 盧文玉, 둘째 아들 盧貞玉이 기재되어 있다. 처 옥천옹씨는 42세로 경진(1820)생이다. 처의 부친은 학생 邕哲秀이고, 조부는 학생 邕日華이며, 증조부는 학생 邕允慶이다. 외조부는 학생 洪相濟로 본관은 남양이다.
첫째 아들 노문옥은 15세로 정미(1847)생이고, 둘째 아들 노정옥은 12세로 경술(1850)생이다.
노비는 도망간 여자종 1口가 기재되어 있다. 1858년에 작성된 준호구에는 도망간 남자종 1구가 기재되어 내용이 차이가 있다.
노비 기재사항 뒤에는 '戊午戶口相準印'을 적어 무오년(1858)의 호구와 비교・대조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문서의 좌측에는 行府使의 署押이 있고, 이외에도 潭陽府印과 周挾改印이 확인된다. 또한 문서의 좌측에 '唱色 準色'이 기재되어 있는데, 이는 준호구를 작성한 자들을 나타내는 것이다. 준호구를 작성할 때 전에 보고한 호구단자를 토대로 불러주는 자와 쓰는 자 두 명이 담당하였는데, 이를 각각 '唱'과 '准'이라 한다. 대개는 창색과 준색의 성씨를 쓰고 수결을 하는데 본 문서에는 기재되지 않았다.
한편 문서를 살펴보면 우측 상단 일부가 탈락되었고, 문서의 좌측 중간에는 작은 구멍이 관찰된다. 연관문서에도 같은 위치에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담양의 광산노씨 가문에서는 호구문서를 끈으로 엮어서 보관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참고문헌
권내현,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역사비평사, 2015
이기봉, 고지도를 통해 본 충청지명연구 2, 국립중앙도서관 도서관연구소, 2014
문현주, 조선후기 漢城府에서의 戶口單子·準戶口 작성 과정에 관한 再考, 古文書硏究42, 한국고문서학회, 2013
손병규, 호적, 휴머니스트, 2006
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2003
집필자 : 황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