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7년 노응렬(盧應烈) 준호구(準戶口)

ㆍ자료UCI: KNU+GWKSMC+KSM-XD.1867.4671-20180501.2017000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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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 고문서-증빙류-호적 |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 작성주체 발급 : 담양부(潭陽府)
수취 : 노응렬(盧應烈)
· 작성지역 담양부
· 작성시기 同治陸年(1867)
· 형태사항 41.1 X 47.4 | 1장 | 종이 | 한자 | 낱장
· 인장서명 1 (적색, 정방형, 7.2*7.2, 潭陽府印)
1 (흑색, 장방형, 12.8*6.4, 周挾改字印)
· 원소장처 담양 광산노씨
· 현소장처 원주역사박물관

연결자료

안내정보

1867년(고종 4) 담양부(潭陽府)에서 정묘식년(1867)의 호적대장을 토대로 작성하여 유학(幼學) 노응렬(盧應烈)에게 발급해 준 준호구이다.
문서에 따르면 노응렬계미(1823)생으로, 당시 나이는 45세이고, 본관은 광산이다. 거주지는 담양부 용동면(龍洞面) 복흥리(復興里)이며, 지금의 담양군 용면 일대이다.
가족으로는 처 옥천옹씨(玉川邕氏), 첫째 아들 유학 노경갑(盧敬鉀), 첫째 며느리 장수황씨(長水黃氏), 둘째 아들 동몽(童蒙) 노정옥(盧貞玉)이 있다.
노비는 모두 2구(口)로 여자종 1구와 남자종 1구가 있다.

상세정보

1867년(고종 4) 潭陽府에서 幼學 盧應烈에게 발급해 준 준호구이다.
문서에 따르면 이 준호구는 정묘식년(1867)의 호적대장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노응렬계미(1823)생으로, 당시 나이는 45세이고, 본관은 광산이다. 거주지는 담양부 龍洞面 復興里로 이 지역은 지금의 담양군 용면 일대이다.
노응렬의 사조를 살펴보면 부친은 學生 盧基弼이고, 조부는 학생 盧啓昌이며, 증조부는 通政大夫 折衝將軍 行龍驤衛副護軍 盧漢鳳이다. 외조부는 학생 金洙采로 본관은 광산이다.
가족으로는 처 玉川邕氏, 첫째 아들 유학 盧敬鉀, 첫째 며느리 長水黃氏, 둘째 아들 童蒙 盧貞玉이 있다. 처 옥천옹씨는 48세로 경진(1820)생이다. 처의 부친은 학생 邕哲秀이고, 조부는 학생 邕日華이며, 증조부는 학생 邕㣧慶이다. 외조부는 학생 洪相濟로 본관은 남양이다. 1864년 준호구에 부친의 이름은 '喆秀', 증조부의 이름은 '允慶'으로 기재되어 이름의 한자가 서로 다르게 기재되어 있다.
첫째 아들 노경갑1864년 준호구에 盧文玉으로 적혀 있어 이 문서에는 개명한 사실이 기재되지는 않았지만 이름을 바꾼 것을 알 수 있다. 노경갑정미(1847)생으로 21세이고, 첫째 며느리 장수황씨경술(1850)생으로 18세이다. 첫째 며느리는 1864년 준호구에는 기재되지 않다가 이번 문서에 기재된 것을 볼 때 3년 사이에 혼인할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둘째 아들 노정옥경술(1850)생으로 18세이다.
노비는 여자종과 남자종 각 1口로 모두 2구가 있다.
노비 기재사항 뒤에는 '甲子戶口相準印'을 적어 갑자년(1864)의 호구와 비교・대조하였음을 밝혔다.
문서를 살펴보면 좌측에는 行府使의 署押과 周挾改字印이 있고, 우측에는 潭陽府印이 확인된다. 또한 문서의 좌측에 '唱色 準色'이 기재되어 있는데 이는 준호구를 작성한 자들을 나타내는 것이다. 준호구를 작성할 때 전에 보고한 호구단자를 토대로 불러주는 자와 쓰는 자 두 명이 담당하였는데 이들을 각각 '唱'과 '准'이라 한다. 대개는 창색준색의 성씨를 쓰고 수결을 하는데 본 문서에는 기재하지 않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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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규, 호적, 휴머니스트, 2006
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2003
집필자 : 황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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