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3년 노계명(盧啓明) 호적단자(戶籍單子)

ㆍ자료UCI: KNU+GWKSMC+KSM-XD.1783.4671-20180501.2017000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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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 고문서-증빙류-호적 |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 작성주체 발급 : 노계명(盧啓明)
수취 : 담양부(潭陽府)
· 작성지역 담양부
· 작성시기 癸卯(1783)
· 형태사항 36.2 X 47.3 | 1장 | 종이 | 한자 | 낱장
· 인장서명 1 (적색, 정방형, 7.5*7.5, 潭陽府印)
1 (흑색, 장방형, 13.2*6.1, 周挾改印)
· 원소장처 원주역사박물관
· 현소장처 원주역사박물관

연결자료

안내정보

이 문서는 1783년(정조 7) 유학(幼學) 노계명(盧啓明)이 작성하여 담양부(潭陽府)에 제출한 호적단자이다.
노계명은 당시 37세로 정묘(1747)생이고, 본관은 광산이다. 거주지는 담양부 용천동면(龍泉洞面) 월계리(月溪里)로 이 지역은 지금의 담양군 용면 월계리 일대에 해당한다. 가족으로는 처 한양조씨(漢陽趙氏)가 있다.
노비는 1구(口)가 기재되어 있으나 도망갔다.

상세정보

이 문서는 1783년(정조 7) 幼學 盧啓明이 작성하여 潭陽府에 제출한 호적단자이다.
문서의 작성시기는 간지로 기재되어 있지만 연관문서인 준호구를 통해 작성연도 추정이 가능하다. 담양 광산노씨 가문에 전해진 문서는 모두 37통으로 준호구가 30통, 호적단자가 7통이 있다. 이 문서는 그 가운데 작성시기가 가장 빠른 문서이다.
노계명은 당시 37세로 정묘(1747)생이고, 본관은 광산이다. 거주지는 담양부 龍泉洞面 月溪里로 이 지역은 지금의 담양군 용면 월계리 일대에 해당한다. 연관문서에는 모두 월계리의 계자가 '桂'로 기재되어 있어 '溪'는 오자로 생각된다.
노계명의 부친은 通政大夫 折衝將軍 行龍驤衛副護軍 盧漢鳳이고, 조부는 學生 盧一玖이며, 증조부는 학생 盧俶이다. 외조부는 본관이 수원인 학생 白漢範이다.
가족은 처 漢陽趙氏가 기재되어 있어 주호를 포함하여 모두 2명이 있다. 처 한양조씨는 당시 나이가 33세로 신미(1751)생이다. 처의 부친은 유학 趙聖垕, 조부는 학생 趙昌彦, 증조부는 趙世貞이다. 외조부는 본관이 초계학생 崔宗岳이다.
연관문서를 살펴보면 노계명에게는 1779년생인 아들 盧八元이 있는데, 이 문서가 작성될 당시에는 5세로 함께 거주하였겠지만 문서에는 기재되지 않았다. 이는 미혼의 어린 자녀를 호적에 누락하는 관습으로 인해 당시에는 漏口로 존재한 것이라 추정된다.
가족구성에 관한 기재가 끝난 후에는 노비를 기재하였다. 노비는 도망간 여자종 1口가 기재되어 있다.
작성일자가 기재된 마지막 행에는 '解事'이 적혀 있어, 이 호적단자는 解事 申某가 확인・대조하고 着名한 것을 알 수 있다.
본 문서는 호적단자임에도 준호구에서 볼 수 있는 署押, 官印, 周挾改印 등이 확인된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18세기 후반부터 각 주호가 호구단자 형식이나 준호구 형식의 문서를 1장 작성하여 제출하면 이를 토대로 호적을 등서한 후 돌려주었는데, 이 호구단자도 이러한 변화를 반영한 문서이다.
참고문헌
권내현,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역사비평사, 2015
문현주, 조선후기 漢城府에서의 戶口單子·準戶口 작성 과정에 관한 再考, 古文書硏究42, 한국고문서학회, 2013
손병규, 호적, 휴머니스트, 2006
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2003
집필자 : 황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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