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7년(순조 4) 潭陽府에서 幼學 盧致璇에게 발급해 준 준호구이다.
문서에 따르면 이 준호구는 정묘년(1807)에 작성한 호적대장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노치선은 당시 29세로 기해(1779)생이며, 본관은 광산이다. 거주지는 담양부 龍泉洞 月桂里로 이 지역은 지금의 담양군 용면 월계리 일대이다.
문서에는 노치선이 개명한 사실이 기재되어 있다. 개명 전 이름은 盧八元이며, 이외에도 盧致榮, 盧基弼 등으로 개명하였다. 노치선이 주호로 기재된 호구문서는 모두 15통으로 노치선이 26세이던 1804년부터 80세인 1858년의 문서가 현전한다.
노치선의 사조를 살펴보면 부친은 學生 盧啓昌이고, 생부는 학생 盧啓明이며, 조부는 학생 盧漢鳳이다. 증조부는 학생 盧一玖이고, 외조부는 본관이 전주인 李世周이다. 1804년 준호구에는 노치선의 부친이 생부인 노계명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이 문서에는 부친이 노계창이고 노계명은 생부로 기재되었다. 이를 보아 노치선이 노계창의 양자가 된 것을 알 수 있다. 노계명은 노계창의 아우로 나이차가 21살이나 난다. 그리고 조부 노한봉은 1804년 문서에 직역이 通政大夫 行龍驤衛副護軍으로 기재되어 있는 반면, 이 문서에는 학생으로 바뀌어 기재되어 있다. 또한 이 문서에는 조부와 증조부는 1801년 문서와 같게 기재되었지만, 외조부는 趙鎭垕에서 이세주로 바뀌었다. 노치선이 입양되면서 모친이 달라지게 되므로 외조부도 다르게 기재된 것이다.
가족으로는 처 光山金氏만 기재되어 있다. 광산김씨의 생년은 경자년(1780)이고, 나이는 28세이다. 처의 부친은 유학 金洙采이고, 조부는 학생 金成圭이며, 증조부는 학생 金時鼎이다. 외조부는 학생 曺時孫으로 본관은 창녕이다.
노비는 여자종 1口가 기재되어 있으나, 도망갔으므로 노치선 호에서 실제로 소유한 노비는 없다.
호구문서에 노비를 기재할 때는 대개 주호 및 가족에 대한 기재내용과 구분하여 문서의 좌측 하단에 따로 기재하는데 본 문서에는 구분 없이 기재되었다.
문서 좌측의 상단과 하단이 일부 탈락되었지만 문서의 말미에는 '甲子戶口相準印'이라 기재된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이는 갑자년(1804)의 호구와 비교・대조하였다는 뜻이다.
문서의 좌측에는 行府使의 署押이 있고, 그 우측으로 唱色, 準色이라는 글자가 기재되어 있다. 준호구를 작성할 때 이전에 보고한 호구단자를 토대로 불러주는 자와 쓰는 자 두 명이 담당하였고, 이를 각각 '唱'과 '準'이라 하여 문서에도 기록하였는데 본 문서에는 담당자의 성씨나 이름은 기록하지 않았다. 이외에 官印과 周挾改字印이 찍혀 있어 관의 확인을 마친 문서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문서의 좌측 중간에는 작은 구멍이 관찰된다. 연관문서에도 같은 위치에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담양의 광산노씨 가문에서는 호구문서를 끈으로 엮어서 보관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