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2년(철종 3) 潭陽府에서 幼學 盧基弼에게 발급해 준 준호구이다.
문서에 따르면 이 준호구는 임자식년(1852)에 작성한 호적대장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노기필은 기해(1779)생으로 74세이고, 본관은 광산이다.
거주지는 龍洞面 復興里로 통・호수는 기재하지 않았다. 1846년 준호구에는 거주지가 용동면 山亭里였는데, 이 준호구에는 복흥리로 기재되어 이주한 것으로 생각된다. 담양부 용동면 복흥리는 지금의 담양군 용면 일대로 짐작된다.
노기필의 사조를 살펴보면 부친은 學生 盧啓昌이고, 생부는 학생 盧啓明이며, 조부는 학생 盧漢鳳이다. 증조부는 학생 盧一玖이고, 외조부는 본관이 전주인 학생 李世周이다. 노기필의 사조사항에는 부친 외에도 생부가 기재되어 있다. 이는 노기필이 입양된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연관문서에 따르면 부친 노계창과 생부 노계명은 형제관계로 노계창은 노계명의 형이다.
가족으로는 처 光山金氏, 아들 盧應烈, 며느리 玉川邕氏가 기재되어 있다. 처는 경자(1780)생으로 73세이다. 처의 부친은 학생 金洙采이고, 조부는 학생 金成圭이며, 증조부는 학생 金時鼎이다. 외조부는 학생 曺時孫으로 본관은 창녕이다. 노기필의 처 광산김씨는 1813년 문서에 기재되었다가 1818년 문서부터 기재되지 않았는데, 본 문서에는 처 광산김씨가 다시 기재되었다.
노응렬은 30세로 계미(1823)생이고, 옥천옹씨는 33세로 경진(1820)생이다. 1846년 준호구에는 며느리의 본관이 순창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옥천은 순창의 다른 이름으로 같은 지명을 이른다.
노비는 도망간 남자종 1口가 기재되어 있다.
노비 기재사항 뒤에는 '己酉戶口相準印'을 적어 기유년(1849)의 호구와 비교・대조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문서의 좌측에는 行府使의 署押과 周挾改印이 있으나, 官印은 확인되지 않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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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 황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