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4년 노응렬(盧應烈) 준호구(準戶口)

ㆍ자료UCI: KNU+GWKSMC+KSM-XD.1864.4671-20180501.2017000271
URL
복사
복사하기
· 분류 고문서-증빙류-호적 |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 작성주체 발급 : 담양부(潭陽府)
수취 : 노응렬(盧應烈)
· 작성지역 담양부
· 작성시기 同治三年(1864)
· 형태사항 34.0 X 43.6 | 1장 | 종이 | 한자 | 낱장
· 인장서명 1 (적색, 정방형, 7.2*7.2, 潭陽府印)
1 (흑색, 장방형, 13.0*6.0, 周挾改印)
· 원소장처 담양 광산노씨
· 현소장처 원주역사박물관

연결자료

안내정보

1864년(고종 1) 담양부(潭陽府)에서 갑자식년(1864)의 호적대장을 토대로 작성하여 유학(幼學) 노응렬(盧應烈)에게 발급해 준 준호구이다.
문서에 따르면 이 준호구는 갑자식년(1864)의 호적대장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노응렬은 당시 42세이고, 생년은 계미(1823)생이며, 본관은 광산이다. 거주지는 담양부 용동면(龍洞面) 복흥리(復興里)로 이 지역은 지금의 담양군 용면 일대로 짐작된다. 가족으로는 처 옥천옹씨(玉川邕氏), 첫째 아들 동몽(童蒙) 노문옥(盧文玉), 둘째 아들 동몽 노정옥(盧貞玉)이 있다.
노비는 여자종 1구(口)와 남자종 1구가 있다.

상세정보

1864년(고종 1) 潭陽府에서 幼學 盧應烈에게 발급해 준 준호구이다.
문서에 따르면 이 준호구는 갑자식년(1864)의 호적대장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노응렬은 당시 42세이고, 생년은 계미(1823)생이며, 본관은 광산이다. 거주지는 담양부 龍洞面 復興里이며, 통・호수는 기재하지 않았다. 이 지역은 지금의 담양군 용면 일대로 짐작된다.
노응렬의 사조를 살펴보면 부친은 學生 盧基弼이고, 조부는 학생 盧啓昌이며, 증조부는 通政大夫 折衝將軍 行龍驤衛副護軍 盧漢鳳이다. 외조부는 학생 金洙采로 본관은 광산이다.
가족으로는 처 玉川邕氏, 첫째 아들 童蒙 盧文玉, 둘째 아들 동몽 盧貞玉이 기재되어 있다. 처 옥천옹씨는 45세로 경진(1820)생이다. 처의 부친은 학생 邕喆秀이고, 조부는 학생 邕日華이며, 증조부는 학생 邕允慶이다. 외조부는 학생 洪相濟로 본관은 남양이다. 부친의 이름이 1861년 준호구에는 '哲秀'로 기재되어 철자의 한자가 서로 다르다.
첫째 아들 노문옥은 18세로 정미(1847)생이고, 둘째 아들 노정옥은 15세로 경술(1850)생이다.
노비는 여자종과 남자종 각 1口로 모두 2구가 기재되어 있다. 1861년 준호구에는 여자종 八今이 도망갔다고 기재되어 있는데, 이 문서에는 도망간 사실이 기재되어 있지 않아 변화가 보인다.
노비 기재사항 뒤에는 '辛酉戶口相準印'을 적어 신유년(1861)의 호구와 비교・대조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문서의 좌측에는 行府使의 署押과 周挾改印이 있고, 문서의 우측에는 潭陽府印이 확인된다. 또한 문서의 좌측에 '唱色 準色'이 기재되어 있다. 이는 준호구를 작성한 자들을 나타내는 것으로 준호구를 작성할 때 전에 보고한 호구단자를 토대로 불러주는 자와 쓰는 자 두 명이 담당하였다. 이들을 각각 '唱'과 '准'이라 한다. 대개는 창색준색의 성씨를 쓰고 수결을 하는데, 본 문서에는 기재하지 않았다.
참고문헌
권내현,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역사비평사, 2015
이기봉, 고지도를 통해 본 충청지명연구 2, 국립중앙도서관 도서관연구소, 2014
문현주, 조선후기 漢城府에서의 戶口單子·準戶口 작성 과정에 관한 再考, 古文書硏究42, 한국고문서학회, 2013
손병규, 호적, 휴머니스트, 2006
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2003
집필자 : 황은영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