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조두석(趙斗錫) 간찰(簡札)

ㆍ자료UCI: KNU+GWKSMC+KSM-XF.1922.0000-20210501.2020000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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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 개인-생활-서간
· 작성주체 발급 : 조두석(趙斗錫)
· 작성시기 壬戌(1922)
· 형태사항 18.2 X 76.5 | 1장 | 종이 | 한자 | 낱장
· 원소장처 원주 이정동
· 현소장처 원주 이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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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정보

이 문서는 1922년 7월 4일 조두석(趙斗錫)이 사돈에게 보내는 간찰이다.
사위가 본가로 돌아가면서 조두석의 섭섭함과 다음에 뵐 것을 약속하는 내용이다. 조두석은 아드님의 학교 일정이 정해졌고 돌아갈 마음이 절실하여 섭섭하지만 보낸다고 하였다. 저번에 심한 병세가 있어 걱정되지만 서울아이가 짝이 되어 데려가니 안심이 된다고 하였다. 끝으로 가을에 만나는 것이 어떨지에 대해 문의하며 간찰을 마쳤다.

상세정보

이 문서는 1922년 7월 4일 趙斗錫이 사돈에게 보내는 간찰이다.
간찰은 書簡, 書信, 書札, 簡牘 등으로 부르며, 고문서 형태로 전해진다. 문집에 수록된 간찰은 '書'로 분류하여 수록하기도 하는데, '서'란 고문서 형태의 간찰이 문집에 수록된 것을 말한다. 간찰은 일반적으로 皮封과 내용으로 구성되고, 내용은 다시 本紙와 別紙로 구별할 수 있다. 흔히 간찰이라고 하는 것은 편지의 본문인 본지를 의미한다. 小紙, 胎紙 등으로도 불리는 별지에는 본지에 적기 어려운 구체적인 내용이나 보내는 선물, 은밀한 부탁이나 청탁 등이 기록된다.
간찰의 내용은 書頭, 候問, 自叙, 述事, 結尾로 나뉜다. 서두에는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안부 인사를 적고, 후문에는 상대방의 안부를 묻는다. 자서에는 간찰을 보내는 사람 본인의 근황을 서술하며, 술사에서는 간찰을 보낸 이유를 적고, 결미는 간찰의 마지막 부분으로서 간단히 끝맺는 말과 날짜, 성명, 올림[再拜] 등의 항목을 순서대로 적는다.
수신자는 명확치 않지만 조두석이 자신을 '査弟'라고 칭한 것을 보아 사돈으로 보이며, 간찰의 내용으로 보아 조두석 집안이 신부 측 집안으로 추측할 수 있다. 간찰의 내용을 보면 근래 가을과 함께 그리움이 절절한데, 더욱이 사위가 이별하는 이때에 더 그리울 뿐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지내시는 형편과 부모모시며 형제들도 화목하며 致伯형의 큰집, 작은집, 애어른 모두 한결같이 편안한지 묻고 있다. 이어서 자신은 늙으신 부모의 형편이 겨우 큰탈을 면하였고, 여식도 은택을 입어 그런대로 지내고 있을 뿐이라고 하며 근황을 전했다.
지난달 예를 차려 사람을 보내려 했으나 큰 홍수를 겪어 어찌 할 수가 없어 부끄럽고 군색한 마음이 깊다고 하였다. 아드님의 학교 일정이 정해졌고 돌아갈 생각이 절실하여 섭섭하게도 돌아간다고 하였다. 그런데 저번에 심한 병세로 인해 신음하여서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겠냐며 걱정하였지만, 다행스럽게 서울아이가 짝이 되어 데려가니 안심이 된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가을에 만나는 것이 어떤지 제의하며 간찰을 마쳤다.
간찰의 내용으로 보아 조두석의 집안에서 사위가 머물다가 학교 일정이 정해져 다시 본가로 돌아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혼례는 주자가례에 따라 신부가 신랑 집으로 들어가는 혼례를 치루는 친영의 절차를 따르도록 하였지만, 전통적으로 신부 집에서 혼례를 치루고 신랑 집으로 돌아오는 방식이 오랫동안 이뤄졌다. 이 간찰 또한 신랑이 신부 집인 조두석 집에 머물다가 다시 본가로 돌아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연관문서 1925년 조두석 간찰에 따르면 이 간찰의 작성년도인 임술년1922년임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김효경, 寒喧箚錄에 나타난 조선후기의 간찰 양식, 서지학보 27, 한국서지학회, 2003
박대현, 한문서찰의 격식과 용어 연구,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문창호, 簡札의 安否人事에 대한 類型, 東洋古典硏究 57, 동양고전학회, 2014
윤병화, 혼례의 양상과 절차 고찰, 차문화・산업학42, 국제차문화학회, 2018
집필자 : 정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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