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1921년 3월 13일에 趙斗錫이 사돈에게 보내는 간찰이다.
간찰은 書簡・書信・書札・簡牘 등으로 부르며 고문서 형태로 전해진다. 문집에 수록된 간찰은 '書'로 분류하여 수록하기도 하는데, 고문서 형태의 간찰이 문집에 수록된 것을 말한다. 간찰은 일반적으로 皮封과 내용으로 구성되고, 내용은 다시 本紙와 別紙로 구별할 수 있다. 흔히 간찰이라고 하는 것은 편지의 본문인 본지를 의미한다. 小紙・胎紙 등으로도 불리는 별지에는 본지에 적지 어려운 구체적인 내용이나 보내는 선물, 은밀한 부탁이나 청탁 등을 기록한다.
간찰의 내용은 書頭・候問・自敍・述事・結尾로 나뉜다. 서두에는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안부를 적고, 후문에는 상대방의 안부를 묻는다. 자서에는 간찰을 보내는 사람 본인의 근황을 서술하며, 술사에는 간찰을 보낸 이유를 적고, 결미에는 간찰의 마지막 부분으로서 간단히 끝맺는 말과 날짜, 성명, 올림[재배(再拜)] 등의 항목을 순서대로 적는다. 이 간찰도 이러한 양식을 맞춰서 작성하였다.
조두석이 자신을 '査弟'라고 칭한 것에서 수신인과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사제란 사돈 사이에서 자신을 지칭하는 말로, '査小弟', '査契' 등과 같은 의미이다. 이를 통해서 수신인은 조두석의 사돈임을 알 수 있다.
내용을 보면 조두석은 講服한지 오래되고, 사돈의 연을 맺어 새로운데 예식을 순조로이 치르니 다행스럽다고 하였다. 그리고 따뜻한 날씨에 지내는 형편이 복되고 집안 모두 편한데다가 경사까지 겹치니 축하한다고 하였다. 자신은 부모님이 심한 병환으로 기력을 소진해 회복할 기약이 없어 근심스러우나 다른 식솔들은 별 탈 없다고 하였다. 사위는 몸가짐을 조심해 도리를 알 수 있고 소문과 어긋나지 않아 다행스러움이 크다고 하였다. 예식을 올리는 자리에서 인사를 하지 못해서 흠결이 되지만 앞으로 머지 않아서 만날 날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다고 하였다.
조두석이 말하는 예식은 혼례를 말하며, 현재 사위가 조두석의 집에서 머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에는 신랑이 신부의 집에 와서 혼례를 올리고 얼마간 머무르다가 신부를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연관문서 중 신유년 11월 7일 조두석의 간찰에서 조두석이 딸의 于禮(신부가 신랑 집에 처음 들어가는 의식)를 언급하는데, 조두석의 사위는 약 8달 정도 조두석의 집에 머물렀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사례를 통하여 일제강점기에도 조선후기의 혼례 방식이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연관문서를 통해 이 문서의 작성연도인 신유년은 1921년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조두석이 사돈에게 보낸 간찰은 모두 26건이 전해지고 있으며, 이 간찰은 시기순으로 나열했을 때 1번째 문서이다.
참고문헌
김효경, 조선후기 간찰의 피봉 서식 연구, 고문서연구 31, 고문서학회, 2007
박대현, 한문서찰의 격식과 용어 연구,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백낙천, 조선후기 한글간찰의 형식과 내용, 한말연구18, 한말연구학회, 2006
전병용, 간찰의 안부인사에 대한 유형 연구, 동양고전연구 57, 동양고전학회, 2014
집필자 : 김선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