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1921년 11월 7일에 趙斗錫이 사돈에게 보내는 간찰이다.
간찰은 書簡・書信・書札・簡牘 등으로 부르며 고문서 형태로 전해진다. 문집에 수록된 간찰은 '書'로 분류하여 수록하기도 하는데, 고문서 형태의 간찰이 문집에 수록된 것을 말한다. 간찰은 일반적으로 皮封과 내용으로 구성되고, 내용은 다시 本紙와 別紙로 구별할 수 있다. 흔히 간찰이라고 하는 것은 편지의 본문인 본지를 의미한다. 小紙・胎紙 등으로도 불리는 별지에는 본지에 적지 어려운 구체적인 내용이나 보내는 선물, 은밀한 부탁이나 청탁 등을 기록한다.
간찰의 내용은 書頭・候問・自敍・述事・結尾로 나뉜다. 서두에는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안부를 적고, 후문에는 상대방의 안부를 묻는다. 자서에는 간찰을 보내는 사람 본인의 근황을 서술하며, 술사에는 간찰을 보낸 이유를 적고, 결미에는 간찰의 마지막 부분으로서 간단히 끝맺는 말과 날짜, 성명, 올림[재배(再拜)] 등의 항목을 순서대로 적는다. 이 간찰도 이러한 양식을 맞춰서 작성하였다.
조두석이 자신을 '査弟'라고 칭한 것에서 수신인과의 관계를 알 수 있다. 사제란 사돈 사이에서 자신을 지칭하는 말로, '査小弟', '査契' 등과 같은 의미이다. 그래서 이 간찰의 수신인은 조두석의 사돈임을 알 수 있다.
내용을 보면 조두석은 사돈에게 '于日'을 기다리니 인정을 갑절이나 기쁘게 느낀다는 인사를 하면서 얼음이 어는 때 사돈의 형제가 지내는 형편이 장중하고 아들도 공부에 전념하며 집안 모두 편안한지 안부를 물었다. 이어 자신은 부모를 모시고 자식을 키우는데 늘 두렵고 걱정스러우며 참고 지내다가 원통한 날을 기다리지 못하고 묵은 화가 일어나 마음을 주체하기 어려웠다고 하였다. 于禮의 모양새가 없어서 못난 딸 아이가 지혜롭지 못한 점이 드러나 집안에 들어가는 자리에서 크게 여론을 잃을까 염려가 된다고 하였다. 부축해 절하는 길이 이날이라 생각되어 從叔을 대신 보내며, 추운 길이라 마음이 편하지 않다고 하였다. 자리가 어수선해서 줄인다고 하면서 간찰을 마쳤다.
조선후기에 혼례를 올리게 되면 신랑은 신부의 집에 며칠을 머무르다가 신부를 데리고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 과정을 于歸라고 하며, 우귀하는 날을 우일이라고 하고, 신부가 신랑 집에 처음으로 들어가는 의식을 于禮라고 한다. 조두석의 딸은 우일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 간찰의 시대적 배경은 일제강점기이나 여전히 조선의 풍습을 따라서 혼례를 진행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연관문서를 통해 이 문서의 작성연도인 신유년은 1921년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조두석이 사돈에게 보낸 간찰은 모두 26건이 전해지고 있으며, 이 간찰은 시기순으로 나열했을 때 7번째 문서이다.
참고문헌
김효경, 조선후기 간찰의 피봉 서식 연구, 고문서연구 31, 고문서학회, 2007
박대현, 한문서찰의 격식과 용어 연구,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백낙천, 조선후기 한글간찰의 형식과 내용, 한말연구18, 한말연구학회, 2006
전병용, 간찰의 안부인사에 대한 유형 연구, 동양고전연구 57, 동양고전학회, 2014
집필자 : 김선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