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오죽헌시립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덕수이씨 가문의 문서중 하나로, 1732년(영조 8)에 善山府에서 網障面 禮谷里에 거주하는 通訓大夫 行濟用監判官 李廣義에게 발급한 준호구이다. 문서에는 주호인 이광의에 대한 사항과, 이광의의 사조사항, 첩과 庶母, 아들 내외, 손자, 庶弟에 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문서에 따르면 이광의는 을묘(1675)생으로 당시 나이는 58세이다. 그의 직역인 통훈대부 행제용감판관은 문관 정3품 당하관 품계인 통훈대부와 제용감의 종5품직인 판관은 관직이 관계보다 낮아 행수법에 의해 행자가 붙었다. 제용감은 궁중에서 쓰는 모시, 피물, 마포, 인삼의 진헌 및 의복과 紗, 羅, 綾, 緞의 賜與와 布貨의 染織을 맡아보던 관청이다.
이광의의 사조사항을 살펴보면 부친은 通政大夫 敦寧府都正 李鼎華이고, 조부는 通政大夫 承政院右承旨 兼經筵參贊官 春秋館修撰官 李東溟이며, 증조부는 贈嘉善大夫 戶曹參判 兼同知義禁府事 五衛都摠府副總管 行通訓大 夫平昌郡守 原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 李楫이다. 외조부는 通訓大夫 平昌郡守 原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 宋國龜이고 본관은 은진이다.
이광의의 첩은 28세의 李氏로 기재되어 있는데, 1699년 준호구에는 光州金氏가 처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광주김씨가 죽고 이씨를 첩으로 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문서에 기재된 이광의의 아들은 총 5명으로 첫째 아들 注書 李壽海의 나이는 40세로 계유(1693)생이고, 둘째 아들 進士 李德海로 25세이며, 무자(1708)생이다. 셋째 李詳海은 23세로 경인(1710)생이다. 넷재 李祿海은 20세로 계사(1713)생이고, 다섯째 李善海은 16세로 정유(1717)생이다. 이 중 이수해만 혼인을 하였는데 며느리 金氏는 19세로 나이만 기재되어 있다. 함께 기재되어 있는 손자 李釆泌이 계사(1713)생으로 당시 나이가 20세인 점으로 보아 이수해는 김씨와 재혼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들 중 이상해와 이녹해는 각각 李道海와 李學海에서 개명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광의 보다 12세 어린 庶母 朴氏(46세)도 함께 거주하고 있으며 박씨의 자식으로 보이는 이광의의 庶弟인 李廣孝은 24세로 기축(1709)생이고, 李廣敎은 23세로 경인(1710)년생이며 李廣信은 17세로 병신(1716)생이다.
소유한 노비는 앙역질과 외거질로 구분하여 기재하고 있다. 앙역 노비는 총 73구로 남자종 44구, 여자종 29이고, 이 중 6구는 사망하였다. 외거 노비는 총 49구로 남자종 33구, 여자종 16이다. 주요 거주지역은 성주, 칠곡, 대구, 청도, 밀양, 군위 등이다. 이광의가 소유한 노비는 총 119구이다. 1699년 준호구에 총 86구의 노비가 기재되어 있었던 것과 비교해 볼 때 총 33구의 노비가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다.
문서는 連書 형식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노비질은 한줄 이격하고 행을 낮추어 기록하고 있다. 중앙부분에는 羅乙仁根脚라 쓰여 있는 첨지가 붙어 있다. 行府使의 署押과 10개의 官印이 확인되며, 周挾改印이 찍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