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5년 이광의(李廣義) 고신(告身)

ㆍ자료UCI: KNU+GWKSMC+KSM-XA.1745.1111-20160501.201500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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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 고문서-교령류-고신 | 정치/행정-임면-고신
· 작성주체 발급 : 영조 이금(李昑)
수취 : 이광의(李廣義)
· 작성지역 한성부
· 작성시기 乾隆十年(1745)
· 형태사항 58.0 X 78.0 | 1장 | 종이 | 한자 | 낱장
· 인장서명 1 (적색, 정방형, 10.0*10.0, 施命之寶)
· 원소장처 선산 덕수이씨
· 현소장처 오죽헌시립박물관

연결자료

안내정보

1745(영조 21) 10월 23일에 이광의(李廣義)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임명하는 고신(告身)이다.
가선대부종2품의 품계이고, 동지돈녕부사는 돈녕부에 속한 종2품의 관직이다.
본 문서의 뒷면에는 작은 글씨로 이리(吏吏)오천우(吳天祐)라고 기재되어 있어 문서 작성자가 이조서리 오천우인 것을 알 수 있다.

상세정보

이 문서는 1745년(영조 21) 10월 23일에 李廣義嘉善大夫 同知敦寧府事에 임명하는 告身이다.
가선대부종2품 하계 문관의 품계이다. 동지돈녕부사는 돈녕부에 속한 종2품의 관직이고, 관직명은 동지사이다. 돈녕부는 조선 건국 초기에 태조의 후예가 아니면 封君되지 않은 종친과 외척, 외척의 여러 성과 왕실의 외손의 예우 차원에서 설치된 관청이다. 이들의 정치 참여는 제한하면서 녹봉을 주기 위한 명목이었다. 따라서 동지사는 종친이나 외척 중에서 임명되었고, 정원은 한 명이었다.
이광의의 고신 뒷면에는 한 귀퉁이에 작은 글씨로 '吏吏吳天祐'라고 기재되어 있다. 조선시대 문관의 임명은 吏曹에서 담당하였는데, 문서 작성은 이조의 서리가 맡아서 하였다. 서리들은 문서를 작성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고신에 남겼다. 조선 전기에는 고신 앞면 가운데에 기재하였고, 조선 중기에는 이러한 관례가 사라졌다. 조선 후기에 이와 같은 관례가 다시 등장하는데, 고신 앞면이 아닌 뒷면 귀퉁이에 작은 글씨로 기재하였다는 것이 전기와의 차이점이다.
참고문헌
유지영, 朝鮮時代 任命文書 硏究,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2014
전경목, 고문서, 조선의 역사를 말하다, 휴머니스트, 2013
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2003
집필자 : 박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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