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1849년(헌종 15)에 江陵大都護府에서 幼學 安正詳에게 발급해준 준호구이다.
문서에 따르면 안정상은 江陵府 南面二里 內谷里에 가족들과 살았다. 南面二里는 南二里面의 오기인 것으로 보인다. 연관문서를 통해 강릉 順興安氏 가문은 1816년 이후부터 1831년 사이에 南一里面 金牙只里에서 남이리면 내곡리로 이주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문서를 발급받을 당시 안정상의 나이는 33세로 정축(1817)생이고, 본관은 순흥이다. 안정상은 개명한 이름으로 개명 전 이름은 安正敎이다. 안정상의 사조사항을 보면 부친은 學生 安鳴魯이고, 생부는 安養魯이다. 조부는 及第 安處儉이며, 증조부는 嘉善大夫 行龍驤衛副護軍 安允洽이다. 외조부는 學生 金在說으로 본관은 삼척이다.
1846년 연관문서에는 모친 三陟金氏가 기재되어 있으나, 이 문서에는 생략된 것으로 볼 때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처는 扶安張氏로 나이는 26세이고, 갑신(1824)생이다. 일반적으로 준호구에는 주호의 사조와 더불어 처의 사조도 기재해야 하는데, 이 문서에서는 처 扶安張氏의 사조가 생략되었다.
문서에는 기재되지 않았으나 1855년의 연관문서를 통해 안정상에게 아우 安正詢과 아들 安文德이 있었고, 당시 아우와 아들의 나이는 각각 15세 계사(1833)생, 11세 정유(1837)생인 것이 확인된다.
소유한 노비는 모두 9口로 그 중에 3구는 병술년 2월에 도망갔다. 안정상이 주호가 된 1843년과 1846년에 기재된 노비의 수와 비교하면 1구씩 수가 줄었다.
이 문서를 살펴보면 첫 행에 발급연도와 날짜 및 발급지역을 기재했다. 그 다음 줄을 바꿔 考丙午成籍戶口帳內'라 적어 병오년(1846)에 작성한 호구문서를 참고했음을 밝혔다. 그 후에 주호의 인적사항, 사조사항, 가족사항을 列書했고, 노비는 連書했다. 노비의 기재사항 뒤에는 戶口相準者라 적었다. 官印, 대도호부사의 署押, 周挾者改印을 찍고 朱墨으로 '準'자를 적었다.
안정상이 살았던 내곡리는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심복리와 병합되어 성남면에 편입되었고, 1955년에 강릉시로 다시 편입되면서 현재의 강릉시 내곡동으로 개칭되었다.
문서의 보존상태를 보면 본문 부분에 오염이 보이고 세로로 두 번 접어 보관한 흔적이 있다.
참고문헌
장경준, 조선후기 호적대장과 戶의 성격,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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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주, 조선후기 漢城府에서의 戶口單子·準戶口 작성 과정에 관한 再考, 古文書硏究42, 한국고문서학회, 2013
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2003
집필자 : 조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