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2년 안석귀(安碩貴) 준호구(準戶口)

ㆍ자료UCI: KNU+GWKSMC+KSM-XD.1792.4215-20170501.2016000088
URL
복사
복사하기
· 분류 고문서-증빙류-호적 |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 작성주체 발급 :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
수취 : 안석귀(安碩貴)
· 작성지역 강릉대도호부
· 작성시기 乾隆五十七年(1792)
· 형태사항 56.0 X 53.3 | 1장 | 종이 | 한자 | 낱장
· 인장서명 1 (적색, 정방형, 7.0*7.0, 江陵府印)
1 (흑색, 장방형, 13.0*4.5, 周挾改印)
· 원소장처 강릉 순흥안씨
· 현소장처 춘천 유용태

연결자료

안내정보

이 문서는 1792년(정조 13)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에서 노직(老職)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안석귀(安碩貴)에게 발급해준 준호구이다.
문서를 발급받을 당시 안석귀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 남일리면(南一里面) 김아기리(金牙只里) 제9통 제4호에 가족과 함께 살았다. 문서에 기재된 가족사항은 처 최씨(崔氏), 아들 업유(業儒) 안윤흡(安允洽) 내외, 손자 유학(幼學) 안처검(安處儉) 내외이다.
1792년강릉이 현(縣)에서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되고 난 이듬해이다. 본래 강릉은 대도호부였으나 강릉출신인 이택징(李澤徵)이 역모에 가담하였다고 하여 강상죄(綱常罪)로 처벌을 받게 되면서, 그의 고향인 강릉1782년(정조 6) 8월 2일에 현으로 강등되었다. 이후 10년 뒤인 1791년(정조 15) 대도호부로 복호되었다.

상세정보

이 문서는 1792년(정조 16) 江陵大都護府에서 발급해준 老職 嘉義大夫 同知中樞府事 安碩貴의 준호구이다.
문서에 따르면 안석귀江陵大都護府 南一里面 金牙只里 제9통 제4호에서 처, 아들내외, 손자내외와 함께 거주했다. 統首도 기재되어 있는데 9통의 통수는 盧漢郁이다. 당시 안석귀의 나이는 94세로 기묘(1699)생이며, 본관은 순흥이다.
문서에 기재된 주호의 사조사항을 보면 부친은 折衝將軍 安壽慶이고, 조부는 通政大夫 安楗益이며, 증조부는 노직 가선대부 安奉吉이다. 외조부는 통정대부 金命相으로 본관은 김해이다.
연관문서에서는 처 崔氏를 기재할 때 貞夫人 최씨로 기재했으나 이 문서에서는 정부인이라고 표기하지 않았다.
최씨는 73세로 본관은 경주이다. 부친은 가선대부 崔萬奉이고, 조부는 학생 崔鳳이다. 증조부는 학생 崔文尙이며, 외조부는 가선대부 朴遇奉으로 본관은 밀양이다. 문서에는 최씨의 생년이 기재되어 있지 않으나, 연관문서를 통해 경자(1720)생임을 알 수 있다.
아들은 業儒 安允洽으로 나이는 54세이며, 기미(1739)생이고, 며느리 江陵崔氏는 36세로 정축(1757)생이다. 손자 幼學 安處儉은 26세로 정해(1767)생이며, 손자며느리 旌善全氏의 나이는 27세이고 ,병술(1768)생이다.
소유한 노비는 모두 6口이고 그 중에 1구가 병신년에 도망갔는데, 이전 시기의 연관문서에는 총 7구에서 2구가 도망갔다고 기재했으나, 이 문서에서는 1구를 줄여 기재했다.
이 문서를 살펴보면 먼저 문서 첫줄에 발급연도의 중국연호와 날짜를 기재한 뒤 행을 옮겨 본문을 작성했다. 본문의 기두어는 임자년의 호구문서를 바탕으로 작성했다 하여 '考壬子成籍戶口帳內'이고, 주호의 거주지, 주호 내외의 인적사항 및 사조사항, 가족사항을 차례로 連書했다. 그리고 본문 끝에 己酉戶口相准者를 기재해 이전 식년의 문서와 대조해 작성한 것임을 밝혔다. 그리고 대도호부사의 署押, 官印, 周挾改印을 찍어 준호구가 인증서의 효력을 낼 수 있도록 했다. 주협개인을 찍은 자리에는 朱墨으로 '準'이라 기재하여 관의 인증을 받은 문서라고 한 번 더 표시했다.
강릉1782년(정조 6) 8월 2일부터 1791년(정조 15) 1월 1일까지 大都護府에서 縣으로 강등됐었다. 그 이유는 강릉 출신 李澤徵이 삼강과 오상의 윤리에 어긋나는 綱常罪를 지었기 때문이다. 정조실록에 따르면 1782년(정조 6) 工曹參議 이택징이 역적으로 몰려 처벌을 받았고, 1782년 8월 2일 그의 고향이었던 강릉은 縣으로 강등되었다. 江原道原春道로 명칭이 변경되었다가, 江陵縣으로 강등된지 10년이 지난 1791년(정조 15) 1월 2일에 다시 강릉대도호부로 복호되었다.
참고문헌
장경준, 조선후기 호적대장과 戶의 성격,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5
문현주, 조선후기 戶口文書의 작성 과정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3
문현주, 조선후기 漢城府에서의 戶口單子·準戶口 작성 과정에 관한 再考, 古文書硏究42, 한국고문서학회, 2013
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2003
집필자 : 조영민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