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1816년(순조 16)에 江陵大都護府에서 발급한 嘉善大夫 行龍驤衛副護軍 安允洽의 준호구이다.
문서에 따르면 안윤흡은 江陵大都護府 南一里面 제1통 제5호에 가족과 함께 살았다. 문서에는 統首도 기재되어 있는데 제1통의 통수는 李春伊이다.
당시 안윤흡의 나이는 78세로 기미(1739)생이며, 본관은 순흥이다. 문서에 기재된 주호의 사조사항을 보면 부친은 資憲大夫 同知中樞府事 安碩貴이고, 조부는 折衝將軍 행용양위부호군 安壽慶이다. 증조부는 通政大夫 安揵益이며, 외조부는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崔萬奉으로 본관은 경주이다.
처는 貞夫人 崔氏로 60세이고, 정축(1757)생이며, 본관은 강릉이다. 문서에는 최씨의 사조가 생략되어 있으나 1807년 연관문서를 통해 사조를 알 수 있다. 최씨의 부친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崔光烈이고, 조부는 안일호장 崔東錫이다. 증조부는 가선대부 행용양위부호군 崔文涑이며, 외조부는 학생 李点孫으로 본관은 평창이다.
아들 出身 安處儉은 50세로 정해(1767)생이다. 두 명의 손자 내외도 기재되어 있는데, 첫째 손자는 幼學 安命朝로 나이는 30세이며, 정미(1787)생이다. 첫째 손자 며느리는 三陟金氏로 나이는 33세이며, 갑진(1784)생이다. 둘째 손자는 유학 安命啓로 20세이고, 정사(1797)생이다. 둘째 손자며느리는 旌善全氏로 나이는 21세이며, 병진(1796)생이다.
연관문서에 의하면 안윤흡은 세 명의 손자가 있었는데, 첫째가 안명조이고, 둘째가 安秉恒이며, 셋째는 안명계이다. 그런데 둘째 손자인 안병항이 사망했기 때문에 그 전까지 안병항의 처 江陵朴氏만 기재되었다. 그런데 이 문서에도 기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안병항의 처 강릉박씨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문서에 기재한 노비는 총 17口로 그 중에 1구는 병신년에 도망갔다. 1813년의 연관문서부터는 문서에 買得婢 1구가 새로 기재되었다.
이 문서를 살펴보면 문서 첫줄에는 발급연도의 중국연호와 날짜를 기재했다. 그리고 본문은 행을 옮겨 작성했는데, '考丙子成籍戶口帳內'가 기두어인 것으로 볼 때 병자년(1816)에 작성한 호구문서를 참고해 발급해준 문서인 것을 파악할 수 있다. 그 다음 본문의 내용은 주호의 거주지와 주호의 사조사항, 주호내외의 인적사항, 가족사항을 連書했다. 본문 끝에는 癸酉戶口相準이라 기재해 계유년(1813)의 문서와 대조하여 작성한 문서임을 밝혔다. 그리고 문서에 官印과 大都護府使의 署押, 周挾字改印 및 朱墨으로 追記한 '準'자가 확인된다.
문서의 보존상태를 보면 우측과 중앙 부분, 좌측 상단이 오염된 것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