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1804년(순조 4)에 江陵大都護府에서 幼學 安允洽에게 발급해준 준호구이다.
문서에 따르면 당시 안윤흡의 나이는 66세로 기미(1739)생이며 본관은 순흥이다. 거주지는 강릉대도호부 南一里面 金牙只里 제4통 제2호로 처 崔氏와 아들 安處儉, 손자 安百準, 安弘準과 함께 살았다. 안윤흡의 거주하던 4통의 統首도 기재되어 있는데 이름은 金完得이다.
주호의 사조사항을 보면 부친은 資憲大夫 同知中樞府事 安碩貴이고, 조부는 折衝將軍 行龍驤衛副護軍 安壽慶이며, 증조부는 通政大夫 安楗益이다. 외조부는 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 崔萬奉으로 본관은 경주이다. 이전 시기의 연관문서를 통해 안윤흡의 관직이 業儒에서 유학으로 변화한 것을 알 수 있다.
처 최씨는 48세로 정축(1757)생이며 본관은 강릉이다. 처의 부친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崔光烈이고, 조부는 安逸戶長 崔東錫이다. 증조부는 가선대부 행용양위부호군 崔文涑이며, 외조부는 學生 李点孫으로 본관은 평창이다.
아들은 出身 安處儉으로 나이는 38세이며, 정해년(1767)생이다. 연관문서에는 안처검의 처 旌善全氏를 기재했으나 이 문서부터 기재하지 않고 있다. 손자는 두 명이 있는데, 그 중 첫째는 幼學 安百準으로 나이는 18세이며, 정미(1787)생이다. 둘째는 童蒙 安弘準으로 15세이고, 경술(1790)생이다. 안백준과 안홍준이 어린 나이임에도 호구문서에 등장한 것은, 당시 20세가 넘거나 결혼해야 호구문서에 기재하던 것과 차이를 보이고 있어 흥미로운 부분이다. 한편 문서에는 기재하지 않았으나 연관문서에 따르면 손자가 한 명이 더 있는데, 이름은 安秉瓚으로 당시 나이는 7세이며, 정사(1797)생이다.
문서에 기재한 노비는 총 6口로 그 중에 1구는 병신년에 도망갔다. 연관문서를 살펴볼 때 소유한 노비의 숫자를 다르게 기재한 것이 확인된다.
이 문서를 살펴보면 첫 줄에 발급하는 해의 중국연호와 날짜를 기재하고, 행을 옮겨 본문을 작성했다. 본문의 기두어가 '考甲子成籍戶口帳內'라 기재되어 있어 갑자년(1804)에 작성한 호구문서를 참고해 발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다음 주호의 거주지, 주호내외의 인적사항과 사조사항 그리고 가족사항을 連書했다. 본문 마지막에는 辛酉戶口相準者라 기재해 신유년(1801)의 호구문서와 대조하여 작성한 문서임을 밝혔다. 작성을 마친 후에 수령의 署押, 官印, 周挾字改印을 찍어 인증서의 효력을 낼 수 있도록 했다. 문서의 보존상태는 상단과 중앙 부분이 오염되어 있으며, 가로로 한번 접은 후에 세로로 5~6번 접은 흔적이 남아있다.
참고문헌
장경준, 조선후기 호적대장과 戶의 성격,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5
문현주, 조선후기 戶口文書의 작성 과정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3
문현주, 조선후기 漢城府에서의 戶口單子·準戶口 작성 과정에 관한 再考, 古文書硏究42, 한국고문서학회, 2013
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2003
집필자 : 조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