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1807년(순조 12)에 江陵大都護府에서 幼學 安允洽에게 발급해준 준호구이다.
문서에 따르면 안윤흡은 江陵大都護府 南一里面 金牙只里 제1통 제2호에서 처, 아들, 첫째・둘째 손자 내외와 거주했다. 김아기리 1통의 統首는 金完得으로 기재되어 있다. 안윤흡의 나이는 69세로 기미(1739)생이며, 본관은 순흥이다. 안윤흡의 부친은 資憲大夫 同知中樞府事 安碩貴이고, 조부는 折衝將軍 行龍驤衛副護軍 安壽慶이며, 증조부는 通政大夫 安楗益이다. 외조부는 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 崔萬奉으로 본관은 경주이다.
안윤흡의 처는 江陵崔氏로 나이는 51세이며, 정축(1757)생이다. 처의 부친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崔光烈이고, 조부는 安逸戶長 崔東錫이다. 증조부는 가선대부 행용양위부호군 崔文涑이며, 외조부는 學生 李点孫으로 본관은 평창이다.
아들은 出身 安處儉으로 나이는 41세이며 정해(1767)생이다. 첫째 손자는 安百準에서 安秉衡으로 개명했고, 나이는 21세이며, 정미(1787)생이다. 첫째 손자며느리 三陟金氏는 24세이며, 갑진(1784)생이다. 둘째 손자는 유학 安秉恒이고, 安弘準에서 개명했다. 나이는 18세이며, 경술(1790)생이다. 둘째 손자며느리 江陵朴氏의 나이는 19세이고, 기유(1789)생이다. 문서에는 기재하지 않았으나 연관문서에 따르면 이 시기 손자가 한 명 더 있는데, 이름은 安秉瓚으로 당시 나이는 11세이고, 정사(1797)생이다.
문서에 기재한 노비의 수는 모두 13口로 그 중 1구는 병신년에 도망갔고, 연관문서를 통해 이 문서부터 기재한 노비의 수가 2배 정도 늘어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문서를 살펴보면 첫 줄에 발급한 해의 중국연호와 날짜를 적고 행을 옮겨 본문을 적었다. 그리고 '考丁卯成籍戶口帳內'를 기두어로 하여 정묘년(1807)에 작성한 호구문서를 참고해 발급해준 것임을 밝혔다. 본문에는 주호의 거주지와 주호 내외의 인적사항과 사조사항, 그리고 가족사항을 連書했다. 본문 끝에는 甲子戶口相準者를 기재해 갑자년(1804)의 호구문서와 비교하고 대조하여 작성했음을 밝혔다. 그리고 官印과 수령의 署押, 周挾字改印을 찍고 朱墨으로 '準'자를 적었다.
문서의 보존 상태를 살펴보면 문서의 곳곳에 짙은 오염이 있다.
참고문헌
장경준, 조선후기 호적대장과 戶의 성격,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5
문현주, 조선후기 戶口文書의 작성 과정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3
문현주, 조선후기 漢城府에서의 戶口單子·準戶口 작성 과정에 관한 再考, 古文書硏究42, 한국고문서학회, 2013
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2003
집필자 : 조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