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1831년(순조 31) 江陵大都護府에서 出身 安處儉에게 발급해준 준호구이다.
문서에 따르면 안처검은 江陵大都護府 南二里面 內谷里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 이전 시기의 연관문서에서는 거주지가 南一里面 金牙只里로 되어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다.
문서에 기재된 안처검의 나이는 75세로 정축년(1757)생이며, 본관은 순흥이다. 이전 시기의 연관문서에는 안처검의 생년이 정해(1767)으로 기재되어 있다. 안처검의 부친은 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 安允洽이고, 조부는 資憲大夫 동지중추부사 安碩貴이다. 증조부는 折衝將軍 安壽慶이며, 외조부는 學生 全鎭河로 본관은 강릉이다.
아들은 2명이 기재되어 있는데 모두 혼인하였다. 첫째 아들은 幼學 安養哲이고, 나이는 45세이며, 정미(1787)생이다. 며느리 三陟金氏는 48세이고, 갑진(1786)생이다. 안양철의 개명 전 이름은 安鳴魯로 연관문서에 安命朝과 동인인물 것으로 짐작된다. 둘째 아들은 출신 安養魯이고, 나이는 35세이며, 정사(1797)생이다. 둘째 며느리는 平昌李氏로 나이는 25세이고, 정묘(1807)생이다. 안양로는 1816년 문서에 安命啓라는 이름으로 기재되었다.
손자는 童蒙 安正敎로 나이는 15세이며, 정축(1817)생이다. 문서에 기재되진 않았으나 연관문서를 통해 손자가 한명 더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름은 安正斅이고, 갑신(1824)생으로 당시 나이는 8세이다.
문서에 기재된 노비는 총 17口이고 그 중에 2구는 각각 경인년, 기축년에 사망했고, 3구는 병술년에 도망갔다.
문서를 살펴보면 첫 행에 발급연도의 중국연호, 해당연도의 간지, 날짜를 쓴 뒤에 행을 옮겨 본문을 작성했다. 본문의 기두어가 '考戊子成籍戶口帳內'인 것으로 보아 무자년(1828)의 호구문서를 참고해 발급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은 주호의 인적사항, 사조사항, 가족사항을 連書하고, 문서 마지막에 戶口相準者라 적고 이 문서를 인증한다는 뜻으로 그 아래에 朱墨으로 '準'이라 적었다. 원래 준호구에는 수령의 署押과 官印, 周挾改印이 있어야 하나, 이 문서에는 官印만 확인된다. 문서의 보존상태는 상단과 우측, 중앙부분에 오염이 있고, 가로로 한번 접은 뒤에 세로로 두 번 접은 흔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