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8년 이소다시(李所多屎) 준호구(準戶口)

ㆍ자료UCI: KNU+GWKSMC+KSM-XD.1789.4223-20160501.2015000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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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 고문서-증빙류-호적 |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 작성주체 발급 : 삼척부(三陟府)
수취 : 이소다시(李所多屎)
· 작성지역 삼척부
· 작성시기 嘉慶三年(1789)
· 형태사항 54.5 X 38.2 | 1장 | 종이 | 한자 | 낱장
· 인장서명 1 (적색, 정방형, 7.0*7.0, 三陟府印)
1 (흑색, 장방형, 14.5*4.5, 周挾印)
· 원소장처 삼척 전주이씨
· 현소장처 삼척시립박물관

연결자료

안내정보

이 문서는 1798년(정조 22) 삼척부(三陟府)에서 이귀재(李貴才)가 사망하자 그를 대신한 아들 양인(良人) 이소다시(李所多屎)에게 발급해 준 준호구이다.
문서에 따르면 이소다시는 나이가 55세이고 갑자(1744)생이다. 이소다시의 거주지는 삼척부의 북쪽 도상면(道上面) 제2리 2통 제5호인데 이 지역은 현재 동해시이다.
이 문서는 연서(連書) 형식이며 이소다시의 사조와 처 한양녀(韓良女), 처의 사조, 그리고 아들 보인(保人) 이성대(李成大), 며느리 박양녀(朴良女)가 기재되어 있다.

상세정보

이 문서는 1798년(정조 22) 三陟府에서 李貴才가 사망하자 그를 대신한 아들 良人 李所多屎에게 발급해 준 준호구이다. 이 문서는 連書 형식이며 이소다시의 사조와 처, 처의 사조, 그리고 率子와 며느리에 대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이 가문에 소장중인 문서는 모두 20통인데, 이중 호적관련 문서는 19통으로 1741년에서 1882년까지 작성된 것이다. 문서에 따르면 이소다시는 나이가 55세이고 갑자(1744)생이다. 이귀재가 발급받은 준호구에서는 아들의 이름은 李海무진생이지만, 이 문서에서는 이름이 이소다시이고 갑자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처에 대한 기재사항이 동일한 것으로 보아 같은 인물로 추정된다. 이소다시의 본관은 전주이고 거주지는 삼척부의 북쪽 道上面 제2리 2통 제5호로 이 지역은 현재 동해시이다. 부친이 주호로 기재된 이전의 호구자료에서는 본관을 완산으로 기재하고 있는데 이는 전주의 옛 이름이 완산으로 현재에도 옛 이름과 지금의 이름을 섞어서 쓰는 경우가 있다.
주호의 사조를 살펴보면 부친은 通政大夫 李貴才이고 조부는 李慶夏이다. 증조부는 李重賢이고 외조부는 安驗龍으로 본관은 순흥이다.
가족구성원은 처, 아들, 며느리를 기재하고 있다. 처 韓良女는 나이가 48세이고 신미(1751)생으로 본관은 청주이다. 부친은 韓尙東이고 조부는 通政大夫 韓命伊이다. 증조부는 韓元業이고 외조부는 趙景福으로 본관은 한양이다.
아들 保人 李成大는 나이가 25세로 갑오(1774)생이다. 며느리 朴良女는 나이가 27세이고 임진(1772)생이다. 節現이라고 기재하고 있어 새로이 나타났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이성대의 직역으로 기재된 보인은 조선시대에 軍役에 징발된 正軍을 경제적으로 보조하기 위하여 保가 편성되었으며, 1보는 2丁으로 이루어졌다. 奉足이라고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준호구는 호구장적에 의거하여 관에서 베껴 주는 문서를 말한다. 오늘날의 호적등본과 주민등록등본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호주의 신청에 의해 발급되는 것이 특징이다. 다만 현재의 등본은 신분을 증명하는 것으로 활용되었다면, 준호구는 신분 증명 이외에도 소송관련 사건이 있을 때나, 도망간 노비를 찾을 때, 부역을 부과할 때에 증명하는 자료로 활용되었다.
참고문헌
권내현,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역사비평사, 2015
권내현, 조선후기 호적에 대한 이해-논쟁과 과제, 韓國史硏究165, 한국사연구회, 2014
문현주, 조선후기 漢城府에서의 戶口單子·準戶口 작성 과정에 관한 再考, 古文書硏究42, 한국고문서학회, 2013
손병규, 호적, 휴머니스트, 2006
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2003
집필자 : 황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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