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1771년(영조 47) 三陟府에서 李貴才에게 발급해 준 준호구이다. 이 가문에 소장중인 모두 20통인데, 1741년에서 1882년까지 작성된 것이다. 이중 호적관련 문서는 19통이다.
연관문서를 살펴보면 이귀재의 이름은 1741년 이전에는 李貴才였다가 1741년에는 李時華, 1744년에는 李是和, 1771년에는 다시 李貴才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이귀재의 나이는 53세이고 기해(1719)생으로 본관은 완산이다. 1798년 李所多屎가 부친 이귀재를 대신한 준호구부터는 주호의 본관이 전주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이는 전주의 옛 이름이 완산주이기 때문으로 문서의 분류에서는 편의상 전주이씨가로 통칭하고자 한다.
문서에 의하면 이귀재의 거주지는 삼척부 道上面이다. 1741년과 1744년 문서에는 거주지가 旌善郡이었는데 시점은 알 수 없지만 삼척부로 이주를 하였다. 삼척시 도상면은 현재 동해시이다. 사조의 기재사항을 보면 부친은 李景夏이고 조부는 李重賢이다. 증조부는 李以昌이고 외조부는 全辛伊으로 본관은 정선이다. 사조의 사항에 직역을 기재하지 않고 있다.
가족으로는 처만 기재되어 있는데 처 安召史는 나이가 59세이고 계사(1713)생으로 본관은 순흥이다. 처의 부친은 安險龍이고 조부는 通政 安戒奉이다. 증조부는 嘉善大夫 安立伊이고 외조부는 盧孝信으로 본관은 강릉이다. 1741년과 1744년 문서에서는 처의 부친의 이름을 각각 '儉龍', '險龍'으로 기재하였다. 또한 1780년, 1783년, 1789년의 문서에는 외조부가 全信, 처 안씨의 조부는 安啓奉, 증조부는 安立으로 이름이 다르게 기재되어 삼척 전주이씨가는 사조의 이름을 기재할 때 오기가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문서에는 처에 대한 지칭어를 召史로 기재하고 있는데, 이는 양민의 아내를 나타내는 용어이다. 주호 이귀재가 1741년 정선군에 제출한 호적단자에서는 양반의 아내를 나타내는 지칭어인 氏로 기재한 것과 차이가 있다.
이 문서에는 周挾改印이 2번 날인된 것으로 보이나 첫 번째 날인한 것이 희미하여 다시 날인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관인과 부사의 서압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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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 황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