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강원도 삼척시립박물관에 소장중인 전주이씨가 문서로, 1741년(영조 17) 幼學 李時華가 정선군에 제출한 호구단자이다.
호구단자를 가리키는 말에는 戶口單刺, 戶籍單刺, 戶籍單字가 있는데 서로 상통하면서 사용되고 있다. 이 가문에 소장중인 호적관련 문서는 모두 20통인데, 1741년에서 1882년까지 작성된 것이다. 그 중 이 문서는 첫 번째 문서에 해당된다.
이시화의 본관은 완산이다. 1798년 준호구는 부친 이귀재의 사망으로 아들 李所多屎가 주호를 대신하게 되는데 이 문서부터는 본관이 완산이 아닌 전주로 기재되어 있다. 이는 전주의 옛 이름이 완산주이기 때문에 현재에도 옛 이름과 지금의 이름을 섞어서 쓰는 경우가 있다. 본 문서에서는 편의상 전주이씨가로 통칭하고자 한다.
문서에는 정선군의 旌자가 일부 결락되어 있지만 글자의 윗부분과 면리의 지명을 통하여 정선군임을 짐작할 수 있다. 주호 이시화는 정선군 동면 건천리에 거주하고 있는데, 이곳은 현재 정선군 화암면 건천리이다. 정선군 동면은 조선시대 이래 행정구역에 대한 변동이 없다가 2009년 5월 1일 동면에서 화암면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편 이시화는 세 번째에 해당하는 1771년 문서에서 거주지가 三陟府 道上面으로 기재되어 이주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문서에 따르면 이시화의 개명 전 이름은 李貴才로 개명한 이름 앞에 改名이라고 그 사실을 기록하였다. 그런데 1744년 문서에는 李是和로 기재하고 있어 이름의 한자가 바뀐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 1771년 문서에서는 이름이 다시 李貴才로 기재하였고, 이후 문서에서는 모두 이귀재로 기재하고 있다.
이시화는 나이가 23세이고 기해(1719)생이다. 이시화의 사조사항을 보면, 부친은 유학 李景夏이고, 조부는 學生 李重賢이다. 증조부는 학생 李以昌이고, 외조부는 학생 全辛伊로 본관은 정선이다.
문서에 의하면 가족구성원으로는 처만 기재하고 있는데 처의 사조도 함께 기재하고 있다. 安氏는 나이가 29세이고 계사(1713)생으로 본관은 순흥이다. 처의 부친은 학생 安儉龍이고, 조부는 通政 安戒奉이다. 증조부는 嘉善大夫 安立伊이고 외조부는 학생 盧孝信으로 본관은 강릉이다.
문서를 살펴보면, 부분적으로 마멸되거나 결락된 부분이 확인되고, 세 군데 글자를 고친 흔적이 보이지만 周挾改印이 확인되어, 주협개인이 형식적으로 날인된 것을 알 수 있다. 관인은 통상적으로 1번만 찍는데 본 문서에는 3곳에 날인되어 있다. 문서의 말미에는 주호의 이름을 한 번 더 기재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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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 황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