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1744년(영조 20) 幼學 李是和가 旌善郡으로부터 발급받은 준호구이다.
이 가문에 소장중인 문서는 모두 20통으로, 이중 호적관련 문서는 모두 19통인데 1741년에서 1882년까지 작성된 것이다. 1741년 호구단자에서는 개명한 이름을 '時華'라고 기재하고 있는데 이 문서에서는 '是和'로 기재하고 있다. 이시화의 아들 李所多屎가 주호로 기록된 1798년 준호구에서는 이시화의 개명 전 이름인 '貴才'로 기재하고 있다. 이시화는 나이가 26세이고 기해(1719)생으로 본관은 완산이다. 문서의 분류에서는 편의상 전주이씨 가문으로 통칭하고자 한다.
문서에 따르면 이시화는 나이가 26세이고 기해(1719)생이다. 본관은 완산인데 전주의 옛 이름이 완산주이기 때문에 현재에도 옛 이름과 지금의 이름을 섞어서 쓰는 경우가 있다. 이시화의 사조 중 부친은 유학 李景夏이고, 조부는 學生 李重賢이다. 증조부는 학생 李二昌이고, 외조부는 학생 全辛伊로 본관은 정선이다. 증조부의 이름을 보면 전 식년인 1741년에 작성한 호구단자에서는 '以昌'이라 하였는데 본 문서에서는 '二昌'으로 기재하고 있다. 주호 이시화, 증조부 이이창 모두 음은 같으나 한자가 다르게 기재된 것이다. 한편 이시화의 거주지는 旌善郡 東面 乾川里로 이곳은 현재 화암면 건천리이다. 외조부 전행이의 본관이 정선이므로 이시화의 거주지는 외가와 관련이 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가족으로는 처만 기재가 되었는데 처의 사조도 기재하고 있다. 처 安氏는 나이가 32세이고 계사(1713)생으로 본관은 순흥이다. 처의 부친은 학생 安儉龍이고, 조부는 通政大夫 安戒奉이다. 증조부는 嘉善大夫 安立伊이고 외조부는 盧孝信으로 본관은 강릉이다.
문서를 살펴보면 부분적으로 마멸된 부분이 확인되나 글자 판독에는 무리가 없고, 세 군데 글자를 고친 흔적이 보이지만 두 글자를 고쳤다는 의미인 周挾二字改印이 찍혀있다. 특이한 점은 일반적으로 연호에 찍거나 주협개인과 함께 찍는 관인 외에도 글자를 수정한 곳에 관인을 찍어 표시하는데 세 곳에 관인을 더 찍고 있다. 주호와 주호의 처 기재부분에 官印이 각각 날인되어 있다. 한편 소유한 노비에 대한 기재사항은 없다.
정선군 동면 건천리의 현재 행정구역명은 화암면 건천리이다. 정선군 동면은 조선시대 이래 행정구역에 대한 변동이 없다가 2009년 5월 1일 동면에서 화암면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문서 하단에는 '唱高夢碧 准李道貞'이 기재되어 있다. 이는 문서를 작성하는데 참여한 자들의 이름을 기재한 것이다. 준호구는 주호의 요청에 의해 발급한 것으로, 이전에 보고한 호구단자를 토대로 작성한 호구장적에 기초하여 작성한다. 이때 두 명이 문서를 작성하는데, 불러주는 자와 쓰는 자로 역할을 구분하고, 이를 각각 창과 준이라 하여 문서에도 기록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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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 황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