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9년(헌종 15)에 春川府에서 西上面 盤松里에 거주하는 幼學 李益祜에게 발급한 준호구이다.
춘천 용인이씨 가문의 문서로는 총 22통의 준호구가 현존하고 있다. 첫 번째 문서는 1795년에 작성되었고 마지막 문서인 22번째 문서는 102년 뒤인 1897년에 작성되었다. 해당 문서는 열네 번째 문서가 작성된 이후 4년 뒤에 작성된 열다섯 번째 문서이다.
준호구와 유사한 성격의 문서는 호구단자가 있는데, 호구단자의 기재형식은 준호구와 달리 列書하는 형태이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서면 준호구의 기재 형식과 호구단자의 기재 형식이 혼용된 사례가 나타난다. 해당 문서 역시 사조와 가족구성 사항에 대해서는 열서하고 소유 노비에 대해서는 연서하였다.
문서에 따르면 이익호는 1819년생으로 당시 나이는 31세였고 본관은 용인이다. 이익호에서 李膺祜로 개명했다고 기재되어 있다. 父는 學生 李普喆이고 生父는 學生 李普一이다. 생부가 기재된 것을 통해 이익호는 이보철의 양자였음을 알 수 있다. 祖父는 學生 李宜格이고 曾祖父는 學生 李景春이다. 外祖父는 贈折衝將軍 僉知中樞府事 崔溪이고 본관은 해주이다.
처 潘南朴氏는 1818년생인데 1845년 준호구부터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부는 幼學 朴宗載이고 조부는 成均進士 朴淇源이다. 증조부는 學生 朴師壹이고 외조부는 學生 成時黙이며 본관은 창녕이다. 반남박씨의 외조부인 성시묵도 해당 문서부터 학생으로 기재된 것으로 보아 1845년에서 1849년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2년 전에 발급받은 1845년 준호구에는 노비에 관한 사항이 기재되지 않았으나 해당 준호구에는 다시 기재되고 있다. 이익호 집안의 노비는 남자종 1口, 여자종 3口로 총 4口이다. 1843년 준호구에 기재되었던 노비 5口구의 이름이 그대로 기재되었으나 여자종 1구는 빠져있어 총 4口가 된다. 이들은 노비임에도 성씨가 기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인데 원래 신분이 양인이나 생활이 궁핍하여 이익호의 가문에 自賣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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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 박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