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3년(헌종 9)에 春川府에서 西上面 盤松里에 거주하는 幼學 李暻祜에게 발급한 준호구이다.
춘천 용인이씨 가문의 문서로는 총 22통의 준호구가 현존하고 있다. 첫 번째 문서는 1795년에 작성되었고 마지막 문서인 22번째 문서는 102년 뒤인 1897년에 작성되었다. 해당 문서는 열두 번째 문서와 같은 년도에 작성된 열세 번째 문서이다.
조선시대의 준호구는 오늘날의 호적등본, 주민등록등본과 같은 역할을 하였으며 主戶의 신청에 의해 발급되는 것이 특징이다. 주호가 신청을 하면 해당 관청에서는 호적대장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그 내용을 등서해 발급해 주었다. 준호구의 형식은 발급일자와 발급관서를 먼저 쓰고 考干支成籍戶口帳內를 시작으로 이후에 사조, 가족에 관한 사항, 소유한 노비에 대해 連書하였다. 한편, 준호구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문서로는 호구단자가 있는데 호구단자는 준호구와 달리 列書하였다. 18세기에 들어서면 준호구의 기재 형식이 호구단자와 혼용되는 모습을 보인다. 해당 문서 역시 사조와 가족에 관한 사항은 別行하여 열서하였고 소유한 노비에 대해서는 연서하였다.
일반적으로 준호구에는 관리가 수결을 하고 붉은 인장과 周挾改印을 찍는다. 인장과 주협개인은 각기 다른 위치에 찍지만 해당 문서에는 같은 위치에 서로 겹쳐져 찍혀 있다.
문서에 따르면 이경호는 1820년생으로 당시 나이는 24세였고 본관은 龍仁이다. 父는 學生 李普學이고 祖父는 學生 李宜格이다. 曾祖父는 學生 李景春이고 外祖父는 學生 崔鳳慶이며 본관은 수성이다. 새롭게 등장한 주호 이경호는 가족관계를 통해 보았을 때 앞선 문서의 주호인 李益祜와 동일 항렬의 사촌 형제로 추정된다.
처 朔寧崔氏는 1817년생으로 당시 나이는 27세였다. 부는 幼學 崔克敏이고 조부는 學生 崔學柱이다. 증조부는 學生 崔命性이고 외조부는 學生 朴圭이며 본관은 죽산이다.
소유한 노비는 남자종 2口, 여자종 2口로 총 4口가 있었다. 이 중 남자종들은 姓氏가 기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보통 노비들은 성씨를 갖지 못하는데 이들은 성씨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양인이었으나 생활이 어려워 스스로 노비가 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남자종 홍운놈은 이경호의 조부인 이의격과 그의 아들인 이보일의 소유 노비로 기재되었으나 해당 문서에는 이경호의 소유 노비로 기재되고 있다. 이로 볼 때 홍운놈이 한 가문 안에 속하였으나 여러 집에서 종살이를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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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 박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