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2년(순조 22)에 春川府에서 西上面 盤松里에 거주하는 幼學 李宜格에게 발급한 준호구이다.
춘천 용인이씨 가문의 문서로는 총 22통의 준호구가 현존하고 있다. 첫 번째 문서는 1795년에 작성되었고 마지막 문서인 22번째 문서는 102년 뒤인 1897년에 작성되었다. 해당 문서는 여섯 번째 문서가 작성된 이후 3년 뒤에 작성된 일곱 번째 문서이다.
조선시대의 준호구는 오늘날의 호적등본, 주민등록등본과 그 성격을 같이 하며 신분, 재산의 증명, 노비추쇄시에 이용되었다. 준호구는 각 가문에서 필요로 할 때 관에 신청하였고 관에서는 호적대장의 내용을 근간으로 그 내용을 등서하여 발급해 주었다. 준호구의 형식은 경국대전에 기재되어 있는데 考干支成籍戶口帳內를 기두어로 하고 主戶와 妻의 사조, 가족구성원, 소유 노비에 대한 내용을 連書한다. 준호구와 비슷한 성격을 가지는 문서로는 호구단자가 있는데 호구단자는 준호구와 달리 그 내용을 列書한다. 18세기에는 준호구의 기재 형식이 호구단자와 혼용되는 사례가 나타난다. 해당 문서도 사조와 가족구성원에 대해서는 열서하고 소유 노비에 대한 내용은 연서하였다.
문서에 따르면 이의격은 1755년생으로 당시 나이는 68세였고 본관은 용인이다. 이의격의 父는 學生 李景春이고 祖父는 學生 李德順이다. 曾祖父는 學生 李弘榏이고 外祖父는 學生 李郊이며 본관은 성주이다.
처 靑山鄭氏는 1754년생으로 당시 나이는 69세였다. 부는 學生 鄭台燮이고 조부는 學生 鄭德觀이다. 증조부는 學生 鄭鎭이고 외조부는 學生 黃{氵穎}河이며 본관은 평해이다. 이외에 첫째아들 幼學 李普八(34세), 며느리 水原崔氏(38세), 둘째아들 幼學 李普一(32세), 며느리 豊壤趙氏(37세)와도 함께 거주하였다.
소유한 노비는 남자종 2口, 여자종 3口로 총 5口가 있으나 남자종 1口는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었다. 노비들의 이름과 나이, 출생 연도는 기재되었으나 부모에 대한 정보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특히, 남자종 홍운놈은 노비임에도 성씨와 본관이 기재되어 있는데 앞선 연결자료에서 기재되었던 남자종 홍말손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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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2003
집필자 : 박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