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3년 이익호(李益祜) 준호구(準戶口)

ㆍ자료UCI: KNU+GWKSMC+KSM-XD.1843.4211-20160501.201500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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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 고문서-증빙류-호적 |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 작성주체 발급 : 춘천부(春川府)
수취 : 이익호(李益祜)
· 작성지역 춘천부
· 작성시기 道光二十三年(1843)
· 형태사항 75.7 X 57.2 | 1장 | 종이 | 한자 | 낱장
· 인장서명 1 (적색, 정방형, 8.0*8.0, 春川府印)
1 (흑색, 장방형, 13.0*4.0, 周挾改印)
· 원소장처 춘천 용인이씨
· 현소장처 춘천 김현식

연결자료

안내정보

1843년 이익호(李益祜)춘천부(春川府)로부터 발급받은 준호구(準戶口)이다. 이익호춘천부 서상면(西上面) 반송리(盤松里)에 거주하였고 문서를 발급받을 당시의 나이는 25세였으며 본관은 용인이다. 처(妻) 반남박씨(潘南朴氏)는 26세였다.
소유한 노비는 남자종 1구(口), 여자종 4구(口)로 총 5구(口)가 있었다.

상세정보

1843년(헌종 9)春川府에서 西上面 盤松里에 거주하는 幼學 李益祜에게 발급한 준호구이다.
춘천 용인이씨 가문의 문서는 총 22통의 준호구가 현존하고 있다. 첫 번째 문서는 1795년에 작성되었고 마지막 문서인 22번째 문서는 102년 뒤인 1897년에 작성되었다. 해당 문서는 열한 번째 문서가 작성된 이후 3년 뒤에 작성된 열두 번째 문서이다.
조선시대의 준호구는 오늘날의 호적등본이나 주민등록등본과 그 성격을 같이 하며 신분과 재산의 증명 또는 노비추쇄 시에 사용되었다. 준호구는 각 가문에서 필요시에 관청에 신청했으며 관청에서는 호적대장의 내용을 근거로 등서하여 발급해 주었다. 준호구의 형식은 경국대전에 기재되어 있는데 발급일과 발급날짜를 먼저 쓰고 사조와 가족구성원, 소유 노비에 대해 連書한다. 준호구와 유사한 성격의 문서로는 호구단자가 있는데 호구단자의 기재 방식은 別行하여 列書하는 것이다. 18세기가 되면 준호구의 기재 방식이 호구단자와 혼용되는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해당 준호구도 사조와 가족구성원에 관한 내용은 열서하고 소유 노비에 대해서는 연서하였다.
보통 준호구에는 관리의 수결과 붉은 인장, 周挾改印이 찍혀 있다. 인장과 주협개인은 각각 다른 위치에 찍히는데 해당 문서에서는 인장과 주협개인이 같은 위치에 겹쳐져서 찍혀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문서에 따르면 이익호1819년생으로 당시 나이는 25세였고 본관은 龍仁이다. 이익호李榮祜로 개명하였다. 이익호의 父는 學生 李普喆이고 生父는 學生 李普一이다. 이를 통해 이익호는 동족 혈연 내에서 입양된 양자임을 알 수 있다. 祖父는 學生 李宜格이고 曾祖父는 學生 李景春이다. 外祖父는 折衝將軍 僉知中樞府事 崔溪이고 본관은 해주이다.
潘南朴氏1818년생으로 당시 나이는 26세였다. 부는 幼學 朴宗載이고 조부는 成均進士 朴淇源이다. 증조부는 學生 朴師壹이고 외조부는 幼學 成時黙이며 본관은 창녕이다.
1837년1840년의 문서에서 등장했던 이익호의 아우 李昌祜에 대한 내용은 기재되지 않았다.
소유한 노비는 남자종 1口 , 여자종 4口로 총 5口가 있었다. 이 중 남자종 洪完福(당시 나이 19세)은 1840년 문서의 남자종 洪完祜(당시 나이 16세)와 출생 연도 및 나이가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동일인물로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노비도 개명했음을 알 수 있다. 이익호 집안의 노비들은 姓氏가 기재된 것이 특징인데 이에 대해서는 이들이 양인이었으나 생활이 궁핍하여 스스로 노비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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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주, 조선후기 漢城府에서의 戶口單子·準戶口 작성 과정에 관한 再考, 古文書硏究42, 한국고문서학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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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규, 호적, 휴머니스트, 2006
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2003
집필자 : 박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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