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4년(순조 34)에 春川府에서 西上面 盤松里에 거주하는 幼學 李普一에게 발급한 준호구이다.
춘천 용인이씨 가문의 문서로는 총 22통의 준호구가 현존하고 있다. 첫 번째 문서는 1795년에 작성되었고 마지막 문서인 22번째 문서는 102년 뒤인 1897년에 작성되었다. 해당 문서는 여덟 번째 문서가 작성된 이후 6년 뒤에 작성된 아홉 번째 문서이다.
조선시대의 준호구는 오늘날의 호적등본이나 주민등록등본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3년을 기준으로 발급되었고 각 가문에서 필요시에 관청에 신청하였다. 가문에서 신청하면 해당 관청에서는 호적대장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그 내용을 등서해 발급하였다. 준호구의 형식은 발급일과 발급관서를 먼저 쓰고 考干支成籍戶口帳內로 시작하여 主戶와 妻의 사조, 가족구성 사항, 거느린 노비에 대해 連書하는 방식이었다. 준호구와 유사한 성격을 지니는 문서로는 호구단자가 있는데 호구단자의 기재 방식은 준호구와 달리 列書하는 형식이었다. 18세기에 들어서면 준호구의 기재 형식이 호구단자와 혼재되어 나타나는 모습을 보이는데 해당 문서도 사조와 가족구성 사항에 대해서는 列書하고 소유한 노비에 대해서는 연서하였다.
준호구에는 문서를 발급하고 확인한 관리가 수결을 하고 붉은 인장과 周挾改印을 찍는다. 해당 문서는 인장과 주협개인이 같은 위치에 서로 겹쳐지게 찍은 것이 특징이다.
문서에 따르면 이보일은 1791년생으로 당시 나이는 44세였고 본관은 용인이다. 이보일의 父는 幼學 李宜格이고 祖父는 學生 李景春이다. 曾祖父는 通德郞 李德順이고 外祖父는 學生 鄭台燮이며 본관은 청산이다. 이보일은 앞선 문서들에서 주호로 기재된 이의격의 둘째 아들로 이의격이 아직 생존중인 것으로 보아 分戶한 것으로 보인다.
처 豊壤趙氏는 1786년생으로 당시 나이는 49세였다. 부는 學生 趙明東이고 조부는 學生 趙慶大이다. 증조부는 學生 趙綖이고 외조부는 學生 安命聃이며 본관은 순흥이다.
1837년 李益祜의 준호구에 따르면 이익호가 이보일과 풍양조씨의 아들임을 알 수 있다. 이익호는 이보일과 같은 항렬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李普喆에게 입양되었고 해당 문서에는 기재되지 않았다.
소유한 노비는 여자종 2口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1828년의 준호구에는 여자종 윤섬 1口만 기재되었다. 윤섬은 성씨가 기재되지 않다가 해당 문서에는 류윤섬으로 성씨가 기재되었다. 또한 이보일의 부친인 이의격이 거느리고 있던 남자종 홍운놈이 류윤섬의 남편으로 기재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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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 박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