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4년(순조 4)에 春川府에서 西上面 盤松里에 거주하는 幼學 李宜格에게 발급한 준호구이다. 춘천 용인이씨 가문의 문서는 총 22통의 준호구가 현존하고 있다. 첫 번째 문서는 1795년에 작성되었고 마지막 문서인 22번째 문서는 102년 뒤인 1897년에 작성되었다. 해당 문서는 두 번째 문서가 작성된 이후 3년 뒤에 작성된 세 번째 문서이다.
조선시대의 준호구는 오늘날의 호적등본, 주민등록등본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준호구는 해당 가문에서 필요시에 관청에 신청하면 관청에서는 호적대장을 내용을 근거로 그 내용을 등서하여 발급하였다. 준호구의 형식은 '考干支成籍戶口帳內'로 시작하여 주호와 처의 사조 및 가족사항, 소유 노비에 대해서 連書하였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서면 준호구의 형식과 호구단자의 형식이 혼용되는 사례가 나타난다. 해당 준호구도 주호와 처의 사조에 대해서는 列書하고 소유 노비에 대해서는 연서하였다.
문서에 따르면 이의격은 1755년생으로 당시 나이는 50세였고 본관은 용인이다. 이의격의 父는 學生 李景春이고 祖父는 學生 李德順이다. 曾祖父는 學生 李弘榏이고 外祖父는 學生 李郊이며 본관은 성주이다.
처 靑山鄭氏는 1754년생으로 당시 나이는 51세였다. 부는 學生 鄭台燮이고 조부는 學生 鄭德觀이다. 증조부는 學生 鄭鎭이고 외조부는 學生 黃{氵穎}河이며 본관은 평해이다.
아들 童蒙 李普億은 16세였다. 아들 이보억에 대한 사항은 1795년과 1801년의 준호구에는 기재되지 않았으나 해당 준호구부터 기재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소유한 노비는 남자종 2口, 여자종 1口로 총 3口가 있다. 이 중 남자종 홍말손은 신분이 노비이나 姓과 본관이 기재되어 있다. 이는 홍말손이 생활이 어려워 이의격의 가문에 自賣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권내현,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역사비평사, 2015
문현주, 조선후기 漢城府에서의 戶口單子·準戶口 자성 과정에 관한 再考, 古文書硏究42, 한국고문서학회, 2013
유재춘, 강원도내 戶口 古文書의 현황과 특이사례에 대한 검토, 古文書硏究39, 한국고문서학회, 2011
손병규, 호적, 휴머니스트, 2006
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2003
집필자 : 박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