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1789년에 原州官에서 幼學 崔鎭岌에게 발급한 준호구이다.
문서가 작성될 당시 최진급의 나이는 65세이고, 생년은 을사년(1725)이며, 본관은 강릉이다. 부친은 通德郞 崔日明이고, 조부는 통덕랑 崔道煋이다. 증조부는 折衝將軍 行龍驤衛副護軍 崔東相이며, 외조부는 學生 沈師哲로 본관은 청송이다.
가족으로는 처 吳氏, 첫째 아들 崔海量과 첫째 며느리 李氏, 둘째 아들 出身 崔海旻과 둘째 며느리 元氏, 셋째 아들 崔海鼎과 셋째 며느리 趙氏, 손자 崔秉模와 손자 며느리 趙氏가 있다.
처 오씨의 나이는 62세이고, 무신(1728)생이며, 본관은 흥양이다. 흥양오씨의 부친은 학생 吳時慶이고, 조부는 통덕랑 吳相周이며, 증조부는 典牲署主簿 吳鳴邦이다. 외조부는 본관이 안동인 학생 權益海이다.
첫째 아들 최해량은 40세이고, 경오(1750)생이며, 첫째 며느리 이씨는 46세로 갑자(1744)생이다. 둘째 아들 최해민은 36세이고, 갑술(1754)생이다. 둘째 며느리 원씨의 나이는 32세이며, 생년은 무인(1758)생이다. 셋째 아들 최해정은 27세로, 계미(1763)생이고, 셋째 며느리 조씨는 28세이며, 생년은 임오년(1762)이다.
손자 최병모는 주호의 첫째 아들 최해량의 아들로 나이는 22세이고, 무자(1768)생이다. 손자 며느리 조씨는 24세이며, 생년은 병술년(1766)이다.
주호와 그의 가족이 살았던 곳은 原州牧 古毛谷面 四里 鴨谷村으로, 이 지역은 현재 행정구역상 횡성군 서원면 압곡리에 해당한다.
소유한 노비는 모두 9口로, 남자종 5구와 여자종 4구가 있다.
문서를 살펴보면 좌측 상단에 '行判官'이 적혀 있고, 그 아래에는 원주판관의 署押이 있다. 1760년(영조 36) 강원도관찰사가 원주목사를 겸임하게 된 이후 기존에 정3품이 임명되었던 원주목사는 종5품 판관이 맡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 문서에 '行判官'을 쓰고 원주판관의 서압을 남겼음을 알 수 있다. 문서 좌측 하단에는 官印과 周挾改印이 겹쳐져 찍혀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최진급 가문 문서로 24건의 호구문서가 있다. 이를 주호별로 구분하면 부친 최일명 4건, 최진급 6건, 손자 崔秉珪(秉模) 5건, 증손 崔允大 3건, 현손 崔在寬 6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