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1765년에 原州官에서 幼學 崔日明에게 발급한 준호구이다.
문서에 따르면 최일명의 나이는 62세이고, 생년은 갑신년(1704)이며, 본관은 강릉이다. 거주지는 原州牧 好梅谷面 一里 好梅谷으로, 이 지역은 현재 행정구역상 원주시 호저면 주산리 일대에 해당한다.
주소의 사조를 살펴보면 부친은 通德郞 崔道煋이고, 조부는 折衝將軍 行龍驤衝副護軍 崔東相이다. 증조부는 成均生員 崔文潑이며, 외조부는 出身 元潤文으로 본관은 원주이다.
가족으로는 처 沈氏, 첫째 아들 崔鎭岌과 첫째 며느리 吳氏, 둘째 아들 崔鎭嶷과 둘째 며느리 陳氏가 있다. 처 심씨는 계미(1703)생으로 당시 나이는 63세이고, 본관은 청송이다. 문서에는 61세로 기재되었는데, 이는 단순 오기로 보인다. 청송심씨의 부친은 學生 沈師晢이고, 조부는 秉節校尉 行龍驤衛副司果 沈潤昌이며, 증조부는 학생 沈瑾이다. 외조부는 본관이 강릉인 학생 崔萬錫이다.
첫째 아들 최진급은 41세이고, 을사(1725)생이다. 며느리 오씨는 38세이며, 생년은 무신년(1728)이다. 둘째 아들 최진억의 나이는 31세이고, 을묘(1735)생이다. 둘째 며느리 진씨는 28세이며, 생년은 기미년(1739)이다.
소유한 노비는 여자종 道深과 남자종 富許里가 있다. 남자종 {沙叱}寺里는 무인년에 도망갔다.
문서를 살펴보면 좌측 상단에 '行判官'이 적혀 있고, 그 아래에는 원주판관의 서압이 있다. 1760년(영조 36) 강원도관찰사가 원주목사를 겸임하게 된 이후 기존에 정3품이 임명되었던 원주목사는 종5품 판관이 맡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 문서에 '行判官'을 쓰고 원주판관의 서압을 남겼음을 알 수 있다. 서압 아래로는 風憲, 里正, 監考가 적혀있는데, 문서에는 직임만 기재되어 있으며, 그 위로 官印과 周挾改印이 겹쳐져 찍혀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최일명 가문 문서로 24건의 호구문서가 있다. 이를 주호별로 구분하면 최일명 4건, 아들 최진급 6건, 증손 崔秉珪 5건, 현손 崔允大 3건, 내손 崔在寬 6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