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1759년에 작성된 幼學 崔日明의 호적단자이다.
문서의 첫 행에 戶籍單子로 기재되어 있지만, 서술방식이 連書이고, 官印, 署押, 周挾改印 등을 통해 준호구적인 효력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서가 작성될 당시 최일명의 나이는 56세이고, 갑신(1704)생이며, 본관은 강릉이다. 주호의 부친은 通德郞 崔道煋이고, 조부는 折衝將軍 行龍驤衝副護軍 崔東相이다. 증조부는 成均生員 崔文潑이며, 외조부는 出身 元潤文으로 본관은 원주이다.
가족으로는 처 沈氏, 첫째 아들 崔鎭岌, 며느리 吳氏, 둘째 아들 崔鎭嶷이 있다. 심씨는 계미(1703)생으로, 나이는 57세이고, 본관은 청송이다. 청송심씨의 부친은 學生 沈師晢이고, 조부는 秉節校尉 行龍驤衛副司果 沈潤昌이며, 증조부는 학생 沈瑾이다. 외조부는 본관이 강릉인 학생 崔萬錫이다.
첫째 아들 최진급은 35세이고, 을사(1725)생이다. 며느리 오씨는 32세이며, 생년은 무신년(1728)이다. 둘째 아들 최진억의 나이는 25세이고, 을묘(1735)생이다. 이전 식년인 1756년 최일명 준호구에는 첫째 아들의 이름을 崔鎭九로, 둘째 아들은 崔鎭祚라고 기재하였다. 이 준호구에서는 개명한 사실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연관문서와의 비교를 통해 최일명의 두 아들들은 이름을 바꾸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주호와 그의 가족이 살았던 곳은 原州牧 好梅谷面 一里 好梅谷으로, 이 지역은 현재 행정구역상 원주시 호저면 주산리 일대에 해당한다.
소유한 노비는 여자종 道深이 있다. 도심의 나이는 35세이고, 모친은 사노 海尙이며, 부친의 이름은 알지 못한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최일명 가문 문서로 24건의 호구문서가 있다. 이를 주호별로 구분하면 최일명 4건, 아들 최진급 6건, 증손 崔秉珪 5건, 현손 崔允大 3건, 내손 崔在寬 6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