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1783년에 原州官에서 通德郞 崔日明에게 발급한 준호구이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최일명 가문 문서로 24건의 호구문서가 있다. 이를 주호별로 구분하면 최일명 4건, 아들 崔鎭岌 6건, 증손 崔秉珪 5건, 현손 崔允大 3건, 내손 崔在寬 6건이 다. 이 문서는 최일명이 주호로 등장하는 마지막 문서이다.
문서가 작성될 당시 최일명의 나이는 80세이고, 생년는 갑신년(1704)이며, 본관은 강릉이다. 부친은 通德郞 崔道煋이고, 조부는 折衝將軍 行龍驤衝副護軍 崔東相이며, 증조부는 成均生員 崔文潑이다. 외조부는 贈通政大夫 工曺參議 元胤文이다.
가족구성원은 모두 6명으로 아들 최진급과 며느리 吳氏, 첫째 손자 崔海量과 손자 며느리 李氏, 둘째 손자 崔海旻과 손자 며느리 元氏, 셋째 손자 崔海鼎, 증손 崔秉柱가 있다. 최일명의 처는 靑松沈氏인데, 이 문서에는 심씨가 사망한 사실을 기재하였다.
아들 최진급의 나이는 59세로 생년은 을사년(1725)이다. 며느리 오씨는 56세이고, 무신(1728)생이다. 첫째 손자 최해량은 34세이고, 경오(1750)생이며, 최해량의 처 이씨는 40세로 갑자(1744)생이다. 둘째 손자 최해민은 30세 갑술(1754)생이고, 최해민의 처 원씨는 26세 무인(1758)생이다. 셋째 손자 최해정의 나이는 21세이고, 생년은 계미년(1763)이다. 최해량의 아들인 증손 최병주는 무자(1768)생으로 당시 나이는 16세이다.
최일명과 그의 가족이 살았던 곳은 原州牧 古毛谷面 四里 鴨谷村으로, 이 지역은 현재 행정구역상 횡성군 서원면 압곡리에 해당한다. 연관문서를 살펴보면 1783년 이전에 작성된 문서(1756・1759・1765년)에서는 주호의 거주지가 好梅谷面 一里 好梅谷(현, 원주시 호저면 주산리)으로 기재되었고, 1783년 이후부터는 거주지의 이전이 없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문서를 살펴보면 좌측 상단에 '行判官'이 적혀 있고, 그 아래에는 원주판관의 서압이 있다. 1760년(영조 36) 강원도관찰사가 원주목사를 겸임하게 된 이후 기존에 정3품이 임명되었던 원주목사는 종5품 판관이 맡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 문서에 '行判官'을 쓰고 원주판관의 署押을 남겼음을 알 수 있다. 문서 하단 중간에는 官印과 周挾改印이 겹쳐져 찍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