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5년 정석사(鄭錫師) 준호구(準戶口)

ㆍ자료UCI: KNU+GWKSMC+KSM-XD.1675.4213-20180501.201700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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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 고문서-증빙류-호적 |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 작성주체 발급 : 원주목(原州牧)
수취 : 정석사(鄭錫師)
· 작성지역 원주목
· 작성시기 康熙拾肆年(1675)
· 형태사항 57.0 X 40.0 | 1장 | 종이 | 한자 | 낱장
· 인장서명 3 (적색, 정방형, 7.1*7.1, 原州牧印)
1 (흑색, 장방형, 13.0*5.0, 周挾無改印)
· 원소장처 원주 초계정씨
· 현소장처 원주역사박물관

연결자료

안내정보

이 문서는 1675년(숙종 원년) 원주관(原州官)에서 저전동면(楮田洞面) 만종촌(萬宗村)에 거주하는 장사랑(將仕郞) 정석사(鄭錫師)에게 발급한 준호구이다.
문서에 따르면 정석사계해(1623)생으로 당시 나이는 53세이고, 본관은 초계이다. 주호의 거주지는 현재 원주시 호저면 만종리에 해당한다.
가족은 모친 경주김씨(慶州金氏)와 처 원주원씨(原州元氏)가 있다. 기재되어 있는 노비의 수는 총 14구(口)이다. 그 중 솔거노비가 4구이고, 외거노비가 7구이며, 도망노비의 수는 2구이다.

상세정보

이 문서는 1675년(숙종 1)原州官에서 楮田洞面 萬宗村에 거주하는 將仕郞 鄭錫師에게 발급한 준호구이다.
문서의 첫 행에 '戶口'라 명시하였지만 주호의 인적사항과 가족구성원 및 주호 내외의 사조사항에 대해 連書한 점, 기두어가 '考成籍帳內'인 점, 官의 증빙을 받아 발급하였음을 의미하는 官印 3개와, 周挾無改印, 署押이 확인되는 점 등을 통해 이 문서는 준호구임을 알 수 있다.
문서에 따르면 정석사의 당시 나이는 53세이고, 계해(1623)생이며, 본관은 초계이다. 거주지인 저전동면 만종촌은 현재 원주시 호저면 만종리에 해당한다. 정석사의 사조사항을 살펴보면 부친은 嘉善大夫 漢城府左尹 兼五衛都摠府副摠管 八川君 鄭基廣이고, 조부는 贈崇政大夫 議政府左贊成 兼判義禁府事 淸城君 行通政大夫 楊州牧使 鄭爚이며, 증조는 崇政大夫 議政府左贊成 兼判義禁府事 知經筵春秋館事 五衛都摠府都摠管 八溪君 鄭宗榮이다.
정석사의 가족으로는 모친 慶州金氏와 처 原州元氏가 있다.
모친 경주김씨의 나이는 74세로 임인(1602)생이다. 이 문서에서는 모친의 사조사항에 대해서도 기재하고 있다. 경주김씨의 부친은 通訓大夫 行咸平縣監 金埴이고, 조부는 折衝將軍 行龍驤衛副護軍 金汝贊이며, 증조부는 通訓大夫 行忠州都護府判官 金元弼이다. 외조부는 承義郞 崔靈雨로 본관은 해주이다.
원주원씨의 나이는 50세 정묘(1627)생이다. 처의 사조사항을 살펴보면 부친은 定畧將軍 行龍驤衛副司直 元海雄이고, 조부는 通政大夫 行南原都護府使 兼全羅道防禦使 元慎이며, 증조부는 贈嘉善大夫 戶曹參判 同知義禁府事 行宣敎郞 安奇道察訪 元永世이다. 외조부는 通政大夫 趙德立으로 본관은 횡성이다.
연관문서를 통해 정석사원주원씨 슬하에는 자식이 없어, 鄭錫諶의 아들인 鄭洙緖를 입양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기재되어 있는 노비의 수는 총 14口이다. 그 중 솔거노비가 4구이고, 외거노비가 7구이며, 도망노비의 수는 2구이다.
문서의 보존상태는 가로와 세로로 각각 두 번씩 접힌 흔적과 문서 상단과 중앙부분에 오염이 있다. 또한 연관문서끼리 묶여져 있다.
참고문헌
장경준, 조선후기 호적대장과 戶의 성격,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5
문현주, 조선후기 戶口文書의 작성 과정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3
문현주, 조선후기 漢城府에서의 戶口單子·準戶口 작성 과정에 관한 再考, 古文書硏究42, 한국고문서학회, 2013
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2003
집필자 : 신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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