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정현성(鄭顯成) 호구(戶口)

ㆍ자료UCI: KNU+GWKSMC+KSM-XD.1885.4213-20180501.201700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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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 고문서-증빙류-호적 |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 작성주체 발급 : 정현성(鄭顯成)
수취 : 원주관(原州官)
· 작성지역 원주목
· 작성시기 光緖十一年(1885)
· 형태사항 69.8 X 55.0 | 1장 | 종이 | 한자 | 낱장
· 인장서명 1 (적색, 정방형, 5.6*5.6, 原州官印)
1 (흑색, 장방형, 14.0*4.2, 周挾改印)
· 원소장처 원주 초계정씨
· 현소장처 원주역사박물관

연결자료

안내정보

이 문서는 1885년(고종 22)원주관(原州官)에서 저전동면(楮田洞面) 삼리(三里) 만종촌(萬鍾村)에 거주하는 유학(幼學) 정현성(鄭顯成)에게 발급한 호구이다.
문서에 따르면 정현성경술(1850)생으로 당시 나이는 36세이고 본관은 초계이다. 주호가 거주하고 있는 저전동면 3리 만종촌은 현재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만종리에 해당한다.
정현성은 처 한산이씨(韓山李氏), 동생 정현실(鄭顯實), 제수 강릉최씨(江陵崔氏)와 함께 거주하고 있다.

상세정보

이 문서는 1885년(고종 22)原州官에서 楮田洞面 三里 萬鍾村에 거주하는 幼學 鄭顯成에게 발급한 호구이다.
주호가 거주하고 있는 저전동면 3리 만종촌은 현재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만종리에 해당한다.
이 문서에 따르면 정현성의 당시 나이는 36세로 경술(1850)생이며, 본관은 초계이다. 주호의 부친은 學生 鄭麟和이고, 조부는 학생 鄭鴻瑞이며, 증조부는 학생 鄭必善이다. 외조부는 학생 安栻으로 본관은 죽산이다.
韓山李氏의 나이는 40세로 병오(1846)생이다. 처의 사조사항을 살펴보면 부친은 학생 李敦在이고, 조부는 학생 李謙耈이며. 증조부는 成均生員 李國著이다. 외조부는 학생 韓致容으로 본관은 청주이다.
정현성은 처 외에 동생 유학 鄭顯實 내외와 함께 살고 있는데 정현실의 나이는 30세로 병진(1856)생이다. 정현실1882년 호구에서는 정현경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본 문서에는 정현실로 기재되어 1882~1885년 사이에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 제수 江陵崔氏의 나이는 26세이다. 이 호구에서는 강릉최씨의 생년간지를 기재하고 있지 않지만 연관문서를 통해 강릉최씨경신(1860)생임을 알 수 있다.
이 문서에서는 기재되지 않았지만 연관문서를 통해 당시 정현성에게는 아들 鄭運時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정운시는 당시 13세로 어렸기 때문에 기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연관문서를 살펴보면 원주 초계정씨 가문은 대체로 15세 이상의 나이가 되어야 호구단자 및 준호구에 기재한 것으로 보인다.
문서 첫 행에 호구라 명시하고 있지만 작성방식이 連書이고, 기두어가 考成籍戶口帳內官로 시작하며, 관의 증빙을 받아 발급되었음을 의미하는 官印, 周挾改印, 署押 등이 확인되어 준호구와 같은 효력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서 좌측에 行判官이 기재되고 그 아래 서압이 찍혀있다. 1760년(영조 36) 강원도관찰사원주목사를 겸임하게 된 이후 기존에 정3품이 임명되었던 원주목사는 강등되어 종5품 판관이 맡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 문서에 '行判官'을 쓰고 원주판관의 서압을 남겼음을 알 수 있다.
문서 좌측 하단에는 관인과 주협개인을 겹쳐 찍었으며, 行判官 위에 帖자인을 찍었다.
문서 보전상태를 보면 가로로 두 번, 세로로 두 번 접힌 흔적이 보인다.
참고문헌
장경준, 조선후기 호적대장과 戶의 성격,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5
문현주, 조선후기 戶口文書의 작성 과정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3
문현주, 조선후기 漢城府에서의 戶口單子·準戶口 작성 과정에 관한 再考, 古文書硏究42, 한국고문서학회, 2013
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2003
집필자 : 신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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