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1831년(순조 31)에 原州官에서 楮田洞面 三里 望宗村에 거주하는 幼學 鄭鴻圖에게 발급한 호구이다.
주호의 거주지인 저전동면 3리 망종촌은 현재 원주시 호저면 만종리 일대에 해당한다.
문서 첫 행에 호구라 명시하고 있지만 작성방식이 連書이고, 기두어가 考成籍戶口帳內官로 시작하며, 관의 증빙을 받아 발급되었음을 의미하는 官印, 周挾改印, 署押 등이 확인되어 준호구와 같은 효력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서 좌측에 行判官이 기재되고 그 아래 서압이 찍혀있는데 1760년(영조 36) 강원도관찰사가 원주목사를 겸임하게 된 이후 기존에 정3품이 임명되었던 원주목사는 강등되어 종5품 판관이 맡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 문서에 '行判官'을 쓰고 원주판관의 서압을 남겼음을 알 수 있다.
문서 좌측 하단에 관인과 주협개인이 겹쳐 찍혀있다. 주협개인에는 몇 글자를 고쳤는지 표기하고 있지 않지만 문서를 통해 호수를 고친 흔적을 볼 수 있다.
문서에 따르면 정홍도의 당시 나이는 38세 갑인(1794)생이며, 본관은 초계이다. 주호의 부친은 學生 鄭必善이고, 조부는 학생 鄭琛이며, 증조부는 학생 鄭凞國이다. 외조부는 학생 李遇春으로 본관은 전주이다.
처 江陵崔氏의 나이는 34세이다. 처의 사조를 살펴보면 부친은 학생 崔鉉玉이고, 조부는 학생 崔重朝이며, 증조부는 학생 崔道原이다. 외조부는 학생 權福衡으로 본관은 안동이다.
정홍도는 처 강릉최씨 외에 첫째 동생 鄭鴻肅 내외 및 둘째 동생 鄭鴻元 내외와 함께 거주하였다. 첫째 동생 정홍숙의 나이는 33세로 기미(1799)생이고, 제수 光山金氏의 나이는 34세이다. 둘째 동생 정홍원의 나이는 29세이고, 계해(1803)생이며, 둘째 제수 利川徐氏의 나이는 26세이다. 이 문서에서는 처와 첫째 제수, 둘째 제수의 생년간지가 적혀있지 않지만 연관문서인 1828년 정홍도 호구를 통해 강릉최씨는 무오(1798)생, 광산김씨는 무오(1798)생, 이천서씨는 병인(1806)생 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전문서에서 보인 모친 全州李氏가 이 문서에서부터 기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모친은 1828년에서 1831년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소유하고 노비는 총 2口로 남자종 1구와 여자종 1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