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8년 정현성(鄭顯成) 호구(戶口)

ㆍ자료UCI: KNU+GWKSMC+KSM-XD.1888.4213-20180501.201700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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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 고문서-증빙류-호적 |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 작성주체 발급 : 정현성(鄭顯成)
수취 : 원주관(原州官)
· 작성지역 원주목
· 작성시기 光緖十四年(1888)
· 형태사항 74.0 X 55.1 | 1장 | 종이 | 한자 | 낱장
· 인장서명 1 (적색, 정방형, 5.8*5.8, 原州官印)
1 (흑색, 장방형, 13.0*4.3, 周挾改印)
· 원소장처 원주 초계정씨
· 현소장처 원주역사박물관

연결자료

안내정보

이 문서는 1888년(고종 25)원주관에서 저전동면(楮田洞面) 삼리(三里) 만종촌(萬鍾村)에 거주하는 유학 정현성(鄭顯成)에게 발급한 호구이다.
문서에 따르면 정현성경술(1850)생으로 당시 나이는 39세이고 본관은 초계이다. 주호가 거주하고 있는 저전동면 3리 만종촌은 현재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만종리에 해당한다.
정현성의 가족구성원으로는 처 한산이씨(韓山李氏), 아들 정운시(鄭運時), 며느리 순흥안씨(順興安氏), 동생 정현실(鄭顯實), 제수 강릉최씨(江陵崔氏)가 있다.

상세정보

이 문서는 1888년(고종 25)原州官에서 楮田洞面 三里 萬鍾村에 거주하는 幼學 鄭顯成에게 발급한 戶口이다.
주호가 거주하고 있는 저전동면 3리 만종촌은 현재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만종리에 해당한다.
문서 첫 행에 호구라 명시하고 있지만 작성방식이 連書이고, 기두어가 考成籍戶口帳內官로 시작하며, 관의 증빙을 받아 발급되었음을 의미하는 官印, 周挾改印, 署押 등이 확인되어 준호구와 같은 효력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문서에 따르면 정현성의 당시 나이는 39세로 경술(1850)생이며, 본관은 초계이다. 주호의 부친은 學生 鄭麟和이고, 조부는 학생 鄭鴻瑞이며, 증조부는 학생 鄭必善이다. 외조부는 학생 安栻으로 본관은 죽산이다.
韓山李氏의 나이는 43세로 병오(1846)생이다. 처의 사조사항을 살펴보면 부친은 학생 李敦在이고, 조부는 학생 李謙耈이며. 증조부는 成均生員 李國著이다. 외조부는 학생 韓致容으로 본관은 청주이다.
정현성은 처 외에 아들 鄭運時 내외와 동생 유학 鄭顯實 내외와 함께 살았다. 아들 정운시의 나이는 16세로 계유(1873)생이다. 며느리 順興安氏의 나이는 20세로 기사(1869)생이다. 동생 정현실의 나이는 33세로 병진(1856)생이다. 제수 江陵崔氏의 나이는 29세로 경신(1860)생이다.
이 문서에서 정현성의 아들이 처음 기재되고 있는데, 이전 문서에서는 군역을 지지 않아 호구 및 준호구에 기재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문서 좌측에 行判官이 기재되고 그 아래 서압이 찍혀있다. 이는 1760년(영조 36)부터 강원도관찰사원주목사를 겸임하게 된 이후 정3품 목사가 아닌 종5품 판관원주목의 행정처리를 담당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이 문서에 '行判官'을 쓰고 원주판관의 서압을 남겼음을 알 수 있다.
문서 좌측 하단에는 관인과 주협개인을 겹쳐 찍었으며, 행판관 위에 帖印을 찍었다.
문서 보전상태를 보면 가로로 두 번, 세로로 두 번 접혀 책자 형식으로 보관한 흔적이 보인다.
참고문헌
장경준, 조선후기 호적대장과 戶의 성격,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5
문현주, 조선후기 戶口文書의 작성 과정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3
문현주, 조선후기 漢城府에서의 戶口單子·準戶口 작성 과정에 관한 再考, 古文書硏究42, 한국고문서학회, 2013
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2003
집필자 : 신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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