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0년 정인화(鄭麟和) 호구(戶口)

ㆍ자료UCI: KNU+GWKSMC+KSM-XD.1870.4213-20180501.201700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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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 고문서-증빙류-호적 |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 작성주체 발급 : 정인화(鄭麟和)
수취 : 원주관(原州官)
· 작성지역 원주목
· 작성시기 同治九年(1870)
· 형태사항 74.0 X 51.5 | 1장 | 종이 | 한자 | 낱장
· 인장서명 1 (적색, 정방형, 6.6*6.6, 原州官印)
1 (흑색, 장방형, 13.0*3.9, 周挾改印)
· 원소장처 원주 초계정씨
· 현소장처 원주역사박물관

연결자료

안내정보

이 문서는 1870년(고종 7)원주관(原州官)에서 저전동면(楮田洞面) 삼리(三里) 망종촌(望宗村)에 거주하는 유학(幼學) 정인화(鄭麟和)에게 발급한 호구이다.
문서에 따르면 정인화무자(1828)생으로 당시 나이는 43세이고 본관은 초계이다. 주호의 거주지인 저전동면 3리 망종촌은 현재 원주시 호저면 만종리에 해당된다.
정인화는 처 죽산안씨(竹山安氏), 아들 정현성(鄭顯成), 며느리 한산이씨(韓山李氏), 동생 정용화(鄭龍和), 제수 의령남씨(宜寧南氏)와 함께 거주하고 있다.

상세정보

이 문서는 1870년(고종 7)原州官에서 楮田洞面 三里 望宗村에 거주하는 幼學 鄭麟和에게 발급한 호구이다.
문서 첫 행에 호구라 명시하고 있지만 작성방식이 連書이고, 기두어가 考成籍戶口帳內官로 시작하며, 관의 증빙을 받아 발급되었음을 의미하는 官印, 周挾改印, 署押 등이 확인되어 준호구와 같은 효력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관인과 주협개인은 겹쳐 찍혀있으며 '行判官' 위에 帖字印이 찍혀있다.
문서 좌측에 行判官이 기재되고 그 아래 서압이 찍혀있는데 이는 강원도관찰사원주목사를 겸임하게 되면서 기존에 원주목사의 관장 사항이었던 호적업무를 판관이 관할하였기 때문에 牧使가 아닌 '行判官'을 쓰고, 원주판관의 서압을 남겼음을 알 수 있다.
문서 보존 상태를 보면 가로로 두 번 세로로 두 번 접힌 흔적이 보이고 상단부분에 붉은 점이 찍혀 있다.
문서에 따르면 정인화의 당시 나이는 43세 무자(1828)생이며, 본관은 초계이다. 주호의 거주지인 저전동면 3리 만종촌은 현재 원주시 호저면 만종리에 해당된다. 주호의 부친은 學生 鄭鴻瑞이고, 조부는 학생 鄭必善이며, 증조부는 학생 鄭鄭琛이다. 외조부는 학생 崔鉉玉으로 본관은 강릉이다.
竹山安氏의 나이는 43세로 주호와 동갑이다. 처의 사조사항을 살펴보면 부친은 학생 安栻이고, 조부는 학생 安宗烈이며. 증조부는 학생 安允濠이다. 외조부는 학생 金成礪로 본관은 광산이다.
정인화는 처 외에 아들 鄭顯成 내외, 동생 鄭龍和 내외와 함께 거주하고 있다. 아들 정현성의 나이는 21세로 경술(1850)생이고, 며느리 韓山李氏의 나이는 25세로 병오(1846)생이다.
동생 정용화의 나이는 40세로 신묘(1831)생이고 제수 宜寧南氏의 나이는 43세로 무자(1828)생이다. 연관문서인 1849년 호구에서는 기축(1829)생으로 명시하고 있다.
참고문헌
장경준, 조선후기 호적대장과 戶의 성격,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5
문현주, 조선후기 戶口文書의 작성 과정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3
문현주, 조선후기 漢城府에서의 戶口單子·準戶口 작성 과정에 관한 再考, 古文書硏究42, 한국고문서학회, 2013
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2003
집필자 : 신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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