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1849년(헌종 15)에 原州官에서 楮田洞面 三里 望宗村에 거주하는 幼學 鄭鴻瑞에게 발급한 호구이다.
문서 첫 행에 호구라 명시하고 있지만 작성방식이 連書이고, 기두어가 考成籍戶口帳內官로 시작하며, 관의 증빙을 받아 발급되었음을 의미하는 官印, 周挾改印, 署押 등이 확인되어 준호구와 같은 효력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서 좌측에 行判官이 기재되고 그 아래 서압이 찍혀있다. 이는 강원도관찰사가 원주목사를 겸임하게 되면서 기존에 원주목사의 관장 사항이었던 호적업무를 판관이 관할하였기 때문에 牧使가 아닌 '行判官'을 쓰고, 원주판관의 서압을 남겼음을 알 수 있다.
문서 좌측 하단에 관인과 주협개인이 겹쳐 찍혀있고 가로로 두 번 세로로 두 번 접어 보관한 흔적이 보인다.
문서에 따르면 정홍서의 당시 나이는 56세 갑인(1794)생이며, 본관은 초계이다. 주호의 거주지인 저전동면 3리 망종촌은 현재 원주시 호저면 만종리에 해당된다. 주호의 부친은 學生 鄭必善이고, 조부는 학생 鄭琛이며, 증조부는 학생 鄭凞國이다. 외조부는 학생 李遇春으로 본관은 전주이다.
처 江陵崔氏가 이미 1837년 호구에서 사망한 사실이 기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본 문서에서는 사망했음을 표기하지 않았고, 사조사항까지 기재하고 있다. 강릉최씨의 부친은 학생 崔鉉玉이고, 조부는 학생 崔重朝이며, 증조부는 학생 崔道原이다. 외조부는 학생 權福衡으로 본관은 안동이다.
정홍서는 가족구성원으로는 아들 2명 내외, 동생 2명 내외, 조카 鄭龜和, 조카 鄭奭和 내외 등 총 11명이 있다.
첫째 아들 鄭麟和의 나이는 22세로 무자(1828)생이고, 며느리 竹山安氏는 정인화와 동갑이다. 둘째 아들 鄭龍和의 나이는 19세이고, 신묘(1831)생이다. 며느리 宜寧南氏의 나이는 21세로 기축(1829)생이다.
첫째 동생 鄭鴻䎘의 나이는 51세로 기미(1799)생이고, 제수 光山金氏의 나이는 52세이다. 둘째 동생 鄭鴻祥의 나이는 47세이고 계해(1803)생이다. 둘째 제수 利川徐氏의 나이는 44세이다.
조카 정구화의 나이는 18세로 임진(1832)생이다. 조카 정석화의 나이는 23세로 정해(1827)생이고, 조카며느리 강릉최씨는 정석화와 동갑이다.
소유하고 노비는 2口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