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1887년(고종 24) 春川府에서 幼學 元用奎에게 발급해준 준호구이다.
문서를 발급받을 당시 원용규의 나이는 79세로, 무진(1808)생이며, 본관은 원주이다. 춘천부 南山外一作面 下君子谷里에 거주했다. 이전 연관문서와는 달리 통・호수를 기재하지 않았다. 원용규는 1870년까지 俊用이란 이름을 사용하다가 그 이후에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
문서에 기재된 원용규의 사조사항을 보면 부친은 學生 元興鎭이고 조부는 학생 元福哲이며 증조부는 학생 元泰澄이다. 외조부는 학생 鄭春澤으로 본관은 청산이다. 앞 시기의 연관문서를 보면 사조의 이름이 몇 번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부친 원흥진은 元興學에서 元興鎭으로 바뀌었고, 조부 원복철은 元奉言, 元奉彦, 元奉憲, 元福哲 순서로 다르게 기재했다. 증조부 원태징은 元莫澂, 元莫澄, 元澄秀, 元泰澄 순서로 바뀌었고, 외조부 정춘택은 鄭春赽, 鄭春基, 鄭春澤으로 달리 기재했다.
이 문서는 호구단자와 준호구의 형식이 혼재되어 있다. 이 문서에서는 준호구의 일반적인 기재사항 외에 문서 작성방식이 준호구의 방식인 連書가 아닌 호구단자의 방식인 열서로 기재되어 있다.
18세기 후반부터 각 주호가 호구단자 형식이나 준호구 형식의 문서를 1장 작성하여 제출하면 이를 토대로 호적을 등서한 후 돌려주었는데, 이 준호구도 이러한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남산외일작면 하군자곡리는 현재 춘천시 東山面 君子里로, 1914년 행정구역이 통폐합 되면서 東山外一作面으로 병합되었고, 1917년이 되면서 동산면으로 개칭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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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주, 조선후기 漢城府에서의 戶口單子·準戶口 작성 과정에 관한 再考, 古文書硏究42, 한국고문서학회, 2013
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2003
집필자 : 조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