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7년 원용규(元用奎) 준호구(準戶口)

ㆍ자료UCI: KNU+GWKSMC+KSM-XD.1887.4211-20170501.2016000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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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 고문서-증빙류-호적 |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 작성주체 발급 : 춘천부(春川府)
수취 : 원용규(元用奎)
· 작성지역 춘천부
· 작성시기 光緖十三年(1887)
· 형태사항 36.0 X 38.0 | 1장 | 종이 | 한자 | 낱장
· 인장서명 1 (적색, 정방형, 7.0*7.0, 春川府印)
1 (흑색, 장방형, 14.0*4.5, 周挾改印)
· 원소장처 춘천 원주원씨
· 현소장처 춘천 유용태

연결자료

안내정보

이 문서는 1887년(고종 24) 춘천부(春川府)에서 유학(幼學) 원용규(元用奎)에게 발급해준 준호구이다.
당시 원용규의 나이는 79세로 무진(1808)생이며 본관은 원주이다. 원용규춘천부 남산외일작면(南山外一作面) 하군자곡리(下君子谷里)에 혼자 거주했으며, 1870년까지 원준용(元俊用)이란 이름을 사용했다.
원용규가 거주했던 남산외일작면 하군자곡리는 지금의 춘천시 동산면(東山面) 군자리(君子里)이다.

상세정보

이 문서는 1887년(고종 24) 春川府에서 幼學 元用奎에게 발급해준 준호구이다.
문서를 발급받을 당시 원용규의 나이는 79세로, 무진(1808)생이며, 본관은 원주이다. 춘천부 南山外一作面 下君子谷里에 거주했다. 이전 연관문서와는 달리 통・호수를 기재하지 않았다. 원용규1870년까지 俊用이란 이름을 사용하다가 그 이후에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
문서에 기재된 원용규의 사조사항을 보면 부친은 學生 元興鎭이고 조부는 학생 元福哲이며 증조부는 학생 元泰澄이다. 외조부는 학생 鄭春澤으로 본관은 청산이다. 앞 시기의 연관문서를 보면 사조의 이름이 몇 번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부친 원흥진元興學에서 元興鎭으로 바뀌었고, 조부 원복철元奉言, 元奉彦, 元奉憲, 元福哲 순서로 다르게 기재했다. 증조부 원태징元莫澂, 元莫澄, 元澄秀, 元泰澄 순서로 바뀌었고, 외조부 정춘택鄭春赽, 鄭春基, 鄭春澤으로 달리 기재했다.
이 문서는 호구단자와 준호구의 형식이 혼재되어 있다. 이 문서에서는 준호구의 일반적인 기재사항 외에 문서 작성방식이 준호구의 방식인 連書가 아닌 호구단자의 방식인 열서로 기재되어 있다.
18세기 후반부터 각 주호가 호구단자 형식이나 준호구 형식의 문서를 1장 작성하여 제출하면 이를 토대로 호적을 등서한 후 돌려주었는데, 이 준호구도 이러한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남산외일작면 하군자곡리는 현재 춘천시 東山面 君子里로, 1914년 행정구역이 통폐합 되면서 東山外一作面으로 병합되었고, 1917년이 되면서 동산면으로 개칭되었다.
참고문헌
장경준, 조선후기 호적대장과 戶의 성격,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5
문현주, 조선후기 戶口文書의 작성 과정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3
문현주, 조선후기 漢城府에서의 戶口單子·準戶口 작성 과정에 관한 再考, 古文書硏究42, 한국고문서학회, 2013
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2003
집필자 : 조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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