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1870년(고종 7) 春川府에서 幼學 元俊用에게 발급해준 준호구이다.
문서에 따르면 원준용은 춘천부 南山外一作面 下君子谷里 제1통 3호에서 처 김해김씨와 함께 거주하고 있다.
이 문서에는 주호 원준용의 가족사항과 원준용 내외의 사조사항이 기재되어 있다. 문서를 발급받을 당시 원준용의 나이는 63세로 무진(1808)생이며 본관은 원주이다. 사조사항을 보면 부친은 學生 元興學이다. 조부는 학생 元鳳憲이고 증조부는 학생 元澄秀이다. 외조부는 학생 鄭春澤으로 본관은 청산이다. 이전 시기의 연관문서를 통해 조부인 원봉헌과 증조부인 원징수, 그리고 외조부 정춘택의 이름이 달리 기재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원봉헌의 경우에는 奉言에서 奉彦으로, 그리고 鳳憲으로 변화한 것이 파악된다. 그 다음 원징수의 경우는 莫澂, 莫澄에서 澄秀로 이름을 달리 기재한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정춘택은 鄭春赽에서 鄭春基, 그리고 鄭春澤으로 이름을 바꾸어 기재했다.
처 김해김씨의 나이는 63세로 무진생이며 원준용과 동갑이다. 김씨의 부친은 학생 金順載이고 조부는 학생 金鎭德이며, 증조부는 학생 金植仁이다. 외조부는 학생 金善德으로 본관은 선산이다.
앞 시기의 연관문서를 통해 1868년까지 원준용은 형인 원두용과 함께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 문서에서는 원준용이 주호로 기재되어 있다. 그에 대한 이유가 원준용이 독립해서 새로 일가를 이룬 것인지 혹은 이전 주호인 원두용이 사망하여 주호가 바뀐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 문서는 호구단자와 준호구의 형식이 혼재되어 있다. 이 문서에서는 준호구의 일반적인 기재사항 외에 문서 작성방식이 준호구의 방식인 連書가 아닌 호구단자의 방식인 열서로 기재되어 있다.
18세기 후반부터 각 주호가 호구단자 형식이나 준호구 형식의 문서를 1장 작성하여 제출하면 이를 토대로 호적을 등서한 후 돌려주었는데, 이 준호구도 이러한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춘천부 남산외일작면 하군자곡리는 현재의 춘천시 東山面 君子里 일대이다. 1914년 행정구역의 통폐합이 실시되어 東山外一作面으로 편입되었고, 3년 뒤인 1917년에 동산면으로 개칭되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참고문헌
장경준, 조선후기 호적대장과 戶의 성격,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5
문현주, 조선후기 戶口文書의 작성 과정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3
문현주, 조선후기 漢城府에서의 戶口單子·準戶口 작성 과정에 관한 再考, 古文書硏究42, 한국고문서학회, 2013
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2003
집필자 : 조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