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1858년(철종 9) 幼學 元斗用이 春川府에서 발급받은 준호구이다.
원두용이 거주하던 지역은 춘천부 南山外一作面 下君子谷里 제4통 1호이고, 나이는 61세로 병진(1796)생이며, 본관은 원주이다. 생년에 따른 나이는 62세이나 문서에는 61세로 기재되어 있다.
문서에 따르면 원두용은 아우 유학 元俊用과 제수 金海金氏와 함께 거주하였다. 원두용의 사조사항을 살펴보면 부친은 學生 元興學이고, 조부는 학생 元鳳憲이며, 증조부는 학생 元澄秀이다. 외조부는 학생 鄭春澤으로 본관은 청산이다.
앞 시기의 연관문서를 보면 조부 원봉헌과 증조부 원징수 그리고 외조부 정춘택의 이름 글자가 여러 번 변화한 것이 확인된다. 먼저 원봉헌은 奉言, 奉彦, 鳳憲의 순서대로 이름이 달리 기재되었다. 그리고 원징수는 莫澂, 莫澄에서 澄秀로 이름이 바뀐 것이 확인된다. 정춘택은 鄭春赽, 春基, 春澤의 순서로 바뀌었다.
처의 기재사항에 '故'라고 적혀 있어 사망한 것을 알 수 있으며, 원두용이 주호로 등장하는 호구문서에 같은 내용이 반복적으로 기재되고 있다.
아우 원준용은 51세로 무진(1808)생이다. 그의 처 김해김씨도 51세로 원준용과 생년이 같다.
이 문서는 호구단자와 준호구의 형식이 혼재되어 있다. 이 문서에서는 준호구의 일반적인 기재사항 외에 문서 작성방식이 준호구의 방식인 連書가 아닌 호구단자의 방식인 열서로 기재되어 있다.
18세기 후반부터 각 주호가 호구단자 형식이나 준호구 형식의 문서를 1장 작성하여 제출하면 이를 토대로 호적을 등서한 후 돌려주었는데, 이 준호구도 이러한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원두용이 거주하던 지역은 현재의 춘천시 東山面 君子里에 해당한다. 본래 이 지역은 행정구역상 남산외일작면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東山外一作面에 편입되었고, 3년 뒤인 1917년에 동산외일작면은 동산면으로 개칭되었다.
참고문헌
장경준, 조선후기 호적대장과 戶의 성격,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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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주, 조선후기 漢城府에서의 戶口單子·準戶口 작성 과정에 관한 再考, 古文書硏究42, 한국고문서학회, 2013
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2003
집필자 : 조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