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1819년(순조 19)에 春川府에서 業武 元興學에게 발급해준 준호구이다.
문서에는 주호 내외의 四祖사항과 거주지에 대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문서를 발급받을 당시 원흥학의 나이는 45세로 생년은 을미년(1775)이며, 본관은 원주이다. 처 靑山鄭氏와 함께 춘천부 南山外一作面 君子谷里 제4통 1호에 거주하고 있다. 원흥학의 직역인 업무는 조선후기에 양반들이 사용한 직역으로, 군역을 면제 받는 특권이 있었다. 업무는 무학을 닦는 양반 자제에게 붙었다. 이와는 반대로 業儒가 있었는데, 이 직역은 유학을 공부한 양반 자제가 사용했다.
주호의 사조를 살펴보면 부친은 學生 元鳳憲이고, 조부는 학생 元莫澄이다. 증조부는 老職 嘉義大夫 元得吉이며, 외조부는 학생 李尙으로 본관은 전주이다.
처 청산정씨의 나이는 45세이고, 생년은 을미년(1775)이다. 정씨의 부친은 학생 鄭春基이고, 조부는 折衝將軍 僉知中樞府事 鄭三鳳이다. 증조부는 학생 鄭海敏이며, 외조부는 학생 李時山으로 본관은 전주이다.
이 문서와 앞 시기의 연관문서를 비교했을 때 주호 내외 부친의 이름 한자가 바뀐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원흥학의 부친인 원봉헌의 이름 글자가 奉彦에서 鳳憲으로 바뀌었고, 청산정씨의 부친인 정춘기는 春赽에서 春基로 바뀌었다. 또한, 원흥학의 조부인 원막징도 莫澂에서 莫澄으로 바뀌었다.
연관 문서를 통해원흥학에게는 아들이 두 명 있음을 알 수 있다. 장남은 元斗用으로 이 문서가 작성될 당시 나이는 24살이며, 병진(1796)생이다. 차남은 元俊用이며, 12살이고 생년은 무진년(1808)이다.
준호구의 작성양식은 경국대전 '準戶口式'에 명시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발급년도의 연호를 쓰고, 기두어로 '考某年成籍戶口帳內'를 적는다. 그리고 주호의 가족사항과 주호내외의 사조사항을 連書하여 적는다. 문서 마지막에는 전 식년의 문서와 대조했음을 밝히는 戶口相準者를 적고, 인증의 효력을 발휘하는 官印과 周挾改印 및 수령의 署押을 찍는다.
원흥학 내외가 거주하던 남산외일작면 군자곡리는 현재의 춘천 東山面 君子里이다.
참고문헌
장경준, 조선후기 호적대장과 戶의 성격,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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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주, 조선후기 漢城府에서의 戶口單子·準戶口 작성 과정에 관한 再考, 古文書硏究42, 한국고문서학회, 2013
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2003
집필자 : 조영민